깊게 더 깊게 파고드는 손가락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창백한 얼굴에 푸석푸석하게 마른 입술이 조그맣게 달싹인다. 이제 끝이다. 조금만 더 버티기만 한다면 이 모든것들은 무념의 끝으로 사라지고 말 것이다.
" 사실 어미에게 말했지. "
이제 곧 죽을거라고, 힘없이 주억거리는 옛 사랑의 추억놀음은 손바닥 위에 찰랑거리며 내딛는 종이장 보다도 더 미끄럽고, 기둥이 없게 마련이다. 그래도 아름답고 깨끗하게 포장해야 한다며, 땀과 때에 찌들은 이마를 닦아내며 중얼거렸다.
" 난 잘 살아. "
혀끝에 감도는 질척한 소주의 맛이 그곳에서 먹던 싸구려 위스키보단 달큰했다. 이곳이 너의 나라인건가, 네가 보는 하늘을 같이 보는것 또한 내게 작게 할애할수 있는 쉬운 추억의 끝자락이다. 알겠다고 또 알겠다고 대답하면서 길을 나섰다.
단순하게 몸뚱이를 붙들어 메고 사는게, 모두가 이야기하는 붉고 행복한 이야기의 끄트머리라 한다면 나는 얼마나 너에게 내 속을 쏟아부으며 살아갈수 있을까. 확신이 들지 않는다. 자신감에 물들어 있는 모든 이들의 '영속적인' 표현을 감히 입밖에 낼수 없는건, 편리한 나의 한계다.
작은 논두렁에 쭈그리고 앉아서 네가 준 쪽지를 펼쳤다. 어깨넘어로 배운 단어를 알아들을수 없을만큼 작게 적어내린 너의 활자 사이에 간신히 알아 볼수 있는건. 내 이름. 그리고 '나' 라는것. 그리고 다른 하나의 말.
그 위로 나는 눈물을 쏟았다.
1.
새액새액 가드다란 바람소리를 내며 펌프가 달싹인다. 그 규칙적인 울림을 잠시동안 멀겋게 바라보고 있노라면, 인간의 생장이 얼마나 덧없이 반복적인가를 절감하게 된다. 값지고도 눈부신 행렬이라 포장된 생명은 이렇게 무의미하다. 이 모든것들은 단순하다. 숨을 쉬어야 산다. 숨을 쉬지 못하면 살지 못한다.
콧등에 얹혀진 파란 호스를 움켜쥔채 뽑아내면, 이것은 끝이 되고야 마는.
" 아가 참 잘 잔다 안카나. "
투덕투덕 갈라진 손등으로 연신 이마를 훔쳐내는 시늉을 하는 노인의 목소리는 하얗게 새어나왔다. 몇 안되는 머리카락처럼 힘이 없이 금새 바스라질것같은. 그렇지만 좀 더 많이 미련해 보인다. 따뜻함이 얹혀지는 목소리는 5년전에 문지방에서 건너들었던 그 소리 그대로다.
눈을 부빈다. 마른 눈물이 비집고 흘러나와 이제는 습기조차 없는 그 눈두덩이를 어루만지듯이 부비며 뺨을 대어 본다. 마치 의식처럼 두어시간마다 그녀는 자신의 표피를 맞닿으며 속삭인다. 잘 자고 있나. 일어나 봐라.
푸른 이불 틈새로 빠져나온 하얀 손톱이 가지런하다. 나는 저 손을 무던히도 어루만졌다. 그때엔 좀 더 거칠고, 뭉툭했었다. 단단한 마디에 걸쳐있던 체온은 그 나이의 이들이 그러하듯 반 정도 높고, 시큰했다. 모든것이 생경한 나를 사로잡았다.그것 하나만으로 설명할수조차 없었던 그 끈.
기억이 분절되어 바스라진다.
" 제가 있을테니까, 밥 드시고 오세요. "
" 아니오, 배도 안고프고. "
옆에서 멀겋게 서있던 그녀의 혈육이 나의 말 끝에 추임세를 달며 채근했다. 어매까지 쓰러지면 쟤도 죽는거라얘. 어매 죽으면 누가 쟤 보겠소? 노인의 눈이 깊게 사라진다. 고개를 끄덕거리며 자리를 털고 나온다. 잡고 있던 가재수건을 탁자에 놓으며 노인이 신신당부를 한다.
이번엔 정말 어디 가지 말고, 오래 오래 자 옆에 붙어 계시소. 님자 그냥 또 보낸거 알면 이번엔 정말 가버릴거같으니
부축을 받으며 사라지는 노인의 뒷모습에 익숙한 체향이 뭍어나온다. 마르고 마른 그 풀의 내음. 어깨죽지에 메달려있던 삶의 노곤함이 열아홉에게서 노스란히 흘러나오던 그때에. 턱을 괴고 끌어안았던 그 목덜미에서는 마른 풀 향이 터져나왔었다.
노인의 체온이 그대로인 의자에 앉았다. 오랜 여행에 노곤해진 육신은 따뜻한 온도와 감정에 녹아내린다. 기둥에 어깨를 기대어 물끄러미 바라본다. 앙상한 뺨에 얽혀있는 끈들이 울타리처럼 그곳과 나의 세상을 분리시키고 있다.
그러나, 모든것이 그대로다. 내가 버리고 끊어버렸던 시간은 이곳에 그대로 멈춰있었다. 타인에게 미루었던 원망과 미움은 고스란히 이곳에 남아있다. 불쾌감의 의미로 아랫입술을 깨문다. 짖이겨지는 표피에서 터져나오는 비릿한 미각이 이번엔 나의 생명을 반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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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한 매너리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