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이 떨어지는 수돗가에 서서 쳐다보는 눈동자가 가느다란 갈색이였다는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뺨에 뚝뚝 맺히는 물기를 손등으로 훔치며 입술을 깨물었다. 다섯살때부터 이름을 던지던 사이, 만나서 주먹으로 인사를 대신하던 사이에 어떤 특별함이 있었을까? 똑같은 눈 코 잎, 똑같은 머리카락, 똑같은 교복. 다른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그날 아침의 수돗가에 흐르던 시간만이 뒤틀렸던 것일뿐.
주머니에서 꺼낸 손수건은 언제나 그렇듯 가지런히 접혀있다. 코끝에 스치는 섬유유연제의 냄새 또한 익숙하다. 우리 엄마와 니네 엄마가 마트에 가서 1+1로 사서 같이 나눈 그거네. 라고 말하니, 그런가 하며 웃는다. 웃는 얼굴에 묘하게 가슴 한켠을 씨근덕거리게 했다. 기분이 나빴다. 손수건을 손에 쥐고 우두커니 서서 있었다. 닦지 못한 물은 뺨을 넘어, 목덜미를 스쳐, 윗옷 틈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젖어드는 옷을 보고 더는 참지 못한 녀석이 손수건을 잡아채서 나의 턱을 닦기 시작했다. 마른 손가락의 관절이 표피에 닿자 마자 소름이 돋았다. 입을 다물고 뒷걸음을 쳤다. 기집애가 지저분하게 그러고 다니냐고 핀잔하는 말에 대거리를 할수조차 없었다. 온몸에 곤두서있는 긴장감이 비닐처럼 바스락거리며 뒤덮여왔다. 그 길로 수돗가에서 도망치듯 달려나왔다. 그 이후로 나는 이상한 병이 생겨버렸다.
청심환을 살 돈이 모자라서, 인삼 향이 나는 껌을 샀다. 인삼이 마음을 안정시켜준다는 말은 그 어디에도 없지만 단지 잎사귀의 맛이 난다면 똑같이 내게 안정을 줄지도 모른다는 어설픈 기대를 하고 있어서. 사실 논리적이고 세부적인 사실관계를 헤아리기엔 너무 바쁜 머리와, 호흡이 넘어갈듯 달싹이는 발작을 반복하고 있는 가슴을 주체하는것만으로도 너무 벅차다. 껌을 어금니로 깔짝깔짝 짖이기며, 폐에 마른 숨을 다시 불어넣는다. 그래도 답답한 기분을 털어낼수 없다. 검지 손가락 두개를 들어서 입가를 잡아당겨본다. 하지만 그 상태로 멈춰줘야 할 입꼬리는 바들바들 떨기만 할 뿐이다.
" 여기서 뭐해? "
등을 쿡 찌르는 손에 화들짝 놀라서 돌아보니, 아주머니가 웃고계신다. 담벼락에 달라붙어서 눈을 빼꼼히 내밀고 이곳저곳 살피던 모습을 들켜버려서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허둥지둥 손에 들고있는 쇼핑백을 아주머니에게 건네드리며 꾸벅 허리를 숙였다.
" 엄마가 이거 갖다 드리라고 하셔서 "
와, 이거 또 미안해서 어쩌나. 매번 신세만 지네. 라고 하며 미소를 지으시며 머리를 쓰다듬어주신다. 앞 상황에서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발개진 얼굴을 두 손바닥으로 꼭꼭 가리며 눈만 빼꼼히 열였다. 그걸 보고 또 뭐가 재밌으신지 더 크게 웃으신다. 이러다가 가게 안에 앉아있을 녀석의 귀에라도 들어갈까봐 나는 더 안절부절. 눈을 굴려 주변을 살폈다.
" 요새 왜 자주 안놀러와. 경우랑 싸웠니? "
" 아,아, 아뇨. "
" 옛날엔 맨날 둘이 붙어다니더니, 요샌 그거 통 못보네. "
" 반이 계속 달라서요, 학교에서도 잘 못봐요. "
" 우리 준영이한테 학교에서 경우 감독 잘 하라고 부탁할려고 했는데,
정말 요새는 걔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뭘 물어봐도 대답도 잘 안해"
" 학교에서 되게 잘해요. 선생님들도 예뻐하시고. 애들도 다 좋아하고."
" 그럼 다행이고. 아, 아직 밥 안먹었지? 놀다가 저녁 먹구가. 경우도 안에 있어. "
안에 있다는 말에 눈이 튀어나올뻔했다. 솔직히 급하지도 않다는 심부름을 챙기고 나온건 녀석을 만나기 위한 핑계였으나. 막상 녀석을 마주하게 된다니 용기가 나지 않는다.
복도 끝, 어렴풋하게 지나가는 뒷모습을 볼때마다 나의 다리는 반대방향으로 내달리고, 누군가가 그 이름을 꺼내기만 하면 물을 마시다가 체하기가 일쑤인. 이 괴기한 질병에서 간절하게 벗어나고 싶던 난 이제야 어스름하게 깨닫고 있었다. 벗어나기 위해선 녀석을 정면으로 마주해야 한다는것을. 더이상 떪은 감을 꾸역꾸역 씹어먹는 기분으로 도망다니지 않기 위해서는 녀석을 뛰어 넘어야 한다는것을.
하지만 내 오른발은 또 반보 뒤로 물러서서 바들바들 도름질을 칠 궁리를 한다.
" 아, 아뇨 괜찮아요. 하,학원을 가야해서.. "
더 이상의 만류의 말도, 거북한 마음도 올려놓고 싶지 않아서. 후다닥 인사를 하고 모퉁이를 빠져나왔다. 한참을 달려나가던 발이 점점 툭툭 느릿하게 무거워진다. 힘이 없다. 검지로 두 눈을 꼭 틀어막으며 터덜터덜 걷는 발이 무겁다. 코트 오른쪽에 불룩하게 나온 주머니를 손바닥으로 더듬더듬 찔러보았다. 매끈거리는 포장지가 사각사각 소리를 낸다. 꽤 묵직한 뭉치를 주섬주섬 주머니에서 꺼내서 쳐다보았다. 어설프게 테이프로 치덕치덕 감싸놓은 포장에서 한숨이 나왔다. 가지런히 접어놓은 손수건과 나란히 놓고 보면 또 얼굴이 빨개질것같다.
우웅- 반대편 주머니에서 묵직한 진동이 느껴져서 핸드폰을 꺼냈다. 발신자 표시란에 동글동글하게 나타난 이름. 그 녀석이다. 두 손에 움켜쥔 핸드폰이 온몸을 떨어내며 울고 있는데 버튼을 누르지도 못하고 우두커니 화면을 바라보다가. 아랫입술을 깨물고, 핸드폰을 주머니에 도로 넣는다.
짤막하게 끊긴 틈을 지나, 다시한번 흔들리는 진동. 불을 꺼놓는 소방수처럼 앞뒤도 보지 않고 집어넣어 놓고서는 또 슬그머니 손이 지나와 주머니를 더듬는다. 녀석의 이름을 보는게 언제부터 이렇게 멀미가 나는 일이였을까. 정말 뭐가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되었다. 더듬 더듬 화면을 눌러 귀에 가져다 대었다. 뜨끈한 온기가 귓볼에 닿았다. 추위보다 나를 더 움츠리게 만드는.
- 너, 뭐야?
" 뭐가. "
- 아직 버스 정류장이지? 거기 꼼짝말고 있어
어지러운 마음, 어지러운 공기, 어지러운 숨, 하나같이 쉬운게 없이 난해하기만 한 이것을 다 섞지도 못하고 엉성하게 뭉쳐서 쌓아놓기만 했다. 그래서 누군가가 설명하라고 다그치면 아무말도 못하고 고개를 저을수 밖에 없었다. 나는 왜 너를 더이상 쳐다볼수가 없는걸까. 나 조차도 내게 잘라진 조각을 내밀수가 없는 난해하고 복잡한 퍼즐.
몽롱하게 부는 바람에 뺨이 시큰하다. 어느덧 떨어진 습기에 얼어붙어 버린 자국을 손등으로 훔쳐봤지만 쉽게 가시지 않았다.
눈 앞에 내밀어진 파란 손수건을 보자마자 서러운 마음이 더 북받쳐 오른다. 나는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고, 어떤것도 병 들지 않았는데 어째서 이렇게 되어버린걸까.
" 왜 울어 임마. "
어느샌가 다가온 녀석이 어깨를 붙잡는다. 물기에 퉁퉁 부은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아 고개짓을 하며 손을 뿌리치려 하는데, 빠져나올수가 없다. 고집스레 다문 입술에 꾹꾹 울음을 참아내는 얼굴을 기어이 보이고 말았다. 옅은 한숨을 쉬더니 꼼꼼한 손길로 얼굴을 닦는다. 찐득하게 물이 오른 콧등에 손수건을 감싸고 킁. 하라고 하길래 킁. 을 했더니 꾹 훔쳐내며 웃는다. 속에서 얄미운 마음이 치솟아 이마를 찌푸리고 머리로 어깨를 들이받아버렸다. 다리를 걷어차고 싶었지만. 축구 하는 애 다리를 찼다간 무슨 뒷수습을 당할까 싶어서 참았다. 쿵하니 부딪친 어깨는 푹신한 파카 덕분에 별 아픔이 없다. 약이 오른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 저리가! "
" 알았어. "
" 다시는 나 아는척도 하지 말고, 말도 걸지마."
동네 꼬마처럼 다리에 메달려서 키득거리던 시간은 저 너머로, 어느샌가 키가 팔꿈치의 반 이상을 넘어버린 거리가 이 모든걸 아득하게 만들어 줄 뿐이다. 문득 먼저 받아보게된 편지 봉투안에 들어있는 까만 포도씨앗을 생각없이 입안에 넣어버린 무신경함이 나를 마비시켰다. 그 무신경함으로 말미암아, 더 따뜻하게 다가오는 두 팔이 나의 어깨를 꼭 끌어안는다. 달싹이는 날숨이 정수리 머리칼을 간지럽게 지나간다. 옅은 한숨과도 같은 바람이 지나간다.
" 이거 뭐 이렇게 어렵냐. "
토닥토닥 등을 지나치는 손바닥으로 느껴지는 익숙한 그 느낌은, 13년전에 처음으로 마주했던, 기억조차 가물한 그 어린시절의 그것과 같은 그리움의 색깔이였다. 나 혼자만 뒤틀린세상과 달리, 오롯하게 그 시간을 간직하고 있는 단단한 일상의 푸른색. 웃는 얼굴도, 상냥한 얼굴도 이제는 마음 한켠에 더 아쉽고 서운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 쪽팔리다. "
파카의 한귀퉁이를 꾹 틀어잡으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어깨 너머로 보이는 놀이터에 기우는 햇볓의 노란 조각을 살피며, 언제쯤 이 짓눌린 꿈에서 벗어나게 될 지를 생각했지만. 아무것도 닿아지지 않아 아득할 뿐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