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07 08 보통여자 - 김 승옥
1.
수정은 자기가 속해 있던 세계 전체가 자기를 속였다는 느낌에 떨고 있었다. 그 여자의 기분, 그 여자의 꿈, 그 여자의 육체, 그 여자의 운명, 요컨대 그 여자에게 속해 있는 모든 것은 내팽개쳐져 실은 아무의 보호도 받고 있지 않다는 것을 그 여자는 비로소 깨달았다.
2.
죽으려는 데 대한 냉철한 계산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죽음으로써 거두고 싶은 어떤 효과를 생각하는 것도 아니었다. 무엇엔가 반항하는 거라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물론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어머니마저도 자기를 배신한 것 같고 무의미해 보이지만 그 무엇보다도 무의미해 보이는 건 자기 자신의 존재였다.
없어져야 해. 나 같은건 없어져 버러야해.
3.
그는 그의 해묵은 버릇, 그만큼 강력한 버릇, 그의 인생관과 사이좋게 동서(同棲)하고 있던 버릇을 꺾어버린 그 외침이 무엇의 입에서 통해졌던 것인가를 생각해 보려 했다.
그 무엇, 그것은 어쩌면 수정에 대한 사랑이었을까? 아니면 수정의 전연 때묻지 않은 처녀성에 대한 존경심이었을까? 아니, 자기의 피로감이었을까? 아니면 수정의 어머니였을까? 아니, 수정의 어머니와 맞선으로서 상징될 수 있는, 수정이라는 여자가 등을 대고 있는 사회적 관습이었을까?
(중략)
예의 바르고 셈이 깨끗하고 책임감도 강하고 약속을 잘 지키는 청년이었다. 그것은 그가 세상의 체면, 관습을 존중하는 사람이라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일단 자기만의 문제를 앞에 대하면 그는 도덕, 부도덕을 무시하는 이기주의자가 되고 마는 것이었다. 하기야 따지고 보면, 직장에서는 모범청년일 수 있는 것도 그 이기주의의 또다른 식의 표출에 의한 것인지 모른다.
4.
" 전 그여자가 명훈씨를 사랑하고 있었으면 좋겠어요. "
" 왜? "
" 제가 승리자가 되고 싶어서요. "
정말이지 수정은 세상의 모든 여자가 다 미웠다. 무엇을 철저히 미워해 보기는 생전 처음이었다. 그 여자는 보통 여자로 변하고 있었다.
2009 07 08 강변부인
1.
" 그게 나도 이상해. 그렇게 생각하면 내 마음이 편안해져야 할텐데 아빠가 출근하고 나 혼자 집에 있을 땐 문득문득 금방 미칠것 같은 배신감이 발작해. 내가 다른 남자들한테 준 몸은 아빠한테 준 바로 그 몸인데, 아빠가 다른 여자들한테 주는 몸은 나한테는 한 번도 준 적이 없는 몸이란 말예요. 나한테 그 십분의 일이란 건 단순히 육체적인 문제에 불과하지만 아빠한테는 육체적인것 이상으로, 정신적으로. "
2.
고속도로가 끝나면 이 사람도 떠난다. 떠날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그가 부담스럽지 않고 그에게서 지배를 받고 있다는 느낌이 조금도 들지 않는다.
사람끼리란 그래야 할 것이다. 이별이 없이 어떻게 사랑이 생길 것인가! 이별이 없다면 어떻게 이 구속을 달콤하다고 느낄 것인가!
양일과의 이 짧은 동반에서 느끼는 이 깊은 사랑은 결국 민희 자신의 주체가 극대화함으로써 얻어진 한 톨의 수정 같은 결정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