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1차에 치맥을 할지, 고기를 구우러갈지, 이자카야를 갈지 고민하는 일보다 삼천만배는 (아니 그것보다) 더 어렵다. 하긴 그럴땐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너 좋을대로 해요 라고 미뤄놓고 삼보 뒤에 서서 흘러가는 부표를 쳐다보기 '만'하면 되니얼마나 쉬운가. 선택이 실패하면 나의 탓은 아니다. 버린 입맛을 쩝쩝거리며 타인을 씹어대면 그만이다.
누가 대신 좀 적당하게 선택해주었으면. 무엇이든지 '적당하게' 해두다 보니, 적당하지 않은거나 적당한건지 헷갈리는 일앞에선 무력하게 되고 만다. 그 상황 자체가누린내나는 내 측간같아서 보는 기분이 가히 좋지 않다. 오늘 아침에도 나는 '그러한 것'을 또 마주했다. 신문을 시킨 2달동안 신경 곤두서는 일과 배송사고 빈번 발생에 짜증이 솟구쳐서 당장 끊어버릴까 생각했지만 구독을 차단하면 과연 내가 그 정신없는 와중에 송내역에서 600원을 꼬박꼬박 내며 신문을 살것같지 않다는 생각과 이런식으로 라도 규칙적인 패턴을 유지하지 않는다면 기껏 쌓아놓은 활자매체와의 친교를 차단시킬것 같아 결단을 망설인다. 아마도 나는 이렇게 생각하다가 몇달을 그냥 지나치게 될것이다. 누군가가 적당하게 컷을 해주지 않는다면 합리적인 체계라는 언어로 주변을 포장해도, 물기 마른 장작처럼 비틀기 시작되는 조타실에 발을 내밀수가 없다. 사실 생각하면 간단한 일이다. 스트레스에 위장이 뒤틀리고 머리가 쭈삣거려도 최악의 상황은 아니다. 나의 사지는 멀쩡하고, (비록 아직 모든걸 '과학적으로' 검증하지는 않았으나), 정신을 해방시킬수 있는 시간 또한 존재한다. 고로 나는 무엇이든지 할수 있다. 내키지 않으면 내일 당장이라도 나는 이 모든걸 털어내겠다는 해지의 선언을 할수도 있다. 당분간 통장에 쌓여놓은 XXXX만원으로 몇년은 충분히 먹고 살수 있다. 극악한 빈곤의 수기를 썼던 모 시인이 묘사해놓은 '돈이 없어 피를 팔며 연명했으나 일주일에 한번밖에 되지 않아 피를 팔지 못하는 날에는 허기진 배를 끌어안고 종로 쓰레기 통을 뒤졌다'라는 장면을 마주할 일은 없다. 만약에 기천만원의 돈을 다 써버려도, 나의 부모는 본인들의 허리를 끊어서라도 내 입에 밥 한술을 먹여줄 위인들이시니까.
하지만 나는 최악이라고 생각하며 몸부림친다. 건강한 정신을 좀먹는 타성적인 나의 욕구에 수치심을 느끼고, 매일 마주하는 인류들의 인영만 보아도 신경이 곤두선다. 온 몸과 정신에 힘을 주어 내달려도, 내 그릇은 한정되 있다. 어느 순간 효용가치가 사라지게 되었을땐 가차없이 내잘릴것이라는 불안감이 하루와 하루에 이어지며 목을 조른다. 그 싫고 괴로운 와중에 항상 억지로 웃어야 하는 시간이 힘들다. 단순히 하기 싫다는 이유로 모든걸 떨쳐내고 돌아설수 없는 '지금'이 싫다. 몸부림을 치지만 뛰쳐나갈수 없는것 또한 나의 끊을수 없는 적당함의 질병이다. 실패함에 대한 부담을 온몸으로 짊어지고 싶지 않은 안일한 마음이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아야 겠다는 단단한 기틀 사이로. 이것보다 더 나아지자 않을 미래에 대한 불안함이 축축하게 스며든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감을 상실한 나의 어깨를 더 무겁게 만드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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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터에서의 공포와 용기
"저 그만둡니다. 안녕. 잘 지내세요!”
노르웨이 공영방 송 <엔에르코>(NRK)의 43살 여성 뉴스 앵커 피아 베아테 페데르센이 스튜디오를 떠나던 날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다. 뉴스도 읽지 않은 그는 대신 고용주들이 직원들에게 감당할 수 없는 압박을 가해왔다고 비난했다. 그는 다시 제대로 먹고 밤에 잘 자고 그리고 숨쉴 수 있기를 원한다고 선언했다. 신중하게 생각한 끝에 그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이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말했다.
그는 <엔에르코> 웹사이트에 잠시 올랐던 글에서 비인간적인 인사제도, 스트레스, 사원들의 시각과 불만을 묵살하거나 아예 듣지 않는 관리자들에 대해 알렸다. 그는 <엔에르코>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에서 서서히 진행되는 공포의 감정에 대해 이목을 끌기를 원한다고 말한다.
이 전직 앵커의 묘사에 따르면 회사의 리더십 시스템은 사원들 사이 차별을 목표로 하는 “스트레스에 의한 관리”다. 새로운 시스템은 전혀 아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 시대에 폭발적으로 강화된 시스템이다. 상사들은 언제나 “위기”라고 강변하고, 사원들에게 끊임없이 강한 수준의 아드레날린을 생산시킨다. 이런 행동은 전염성이 강해서, 스트레스에 감염된 사원들은 동료들에게도 스트레스를 전파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트레스를 느끼고 자신이 병들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나 약자나 패배자로 보여 다음 프로젝트에 참여하지 못하거나 승진이 안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자신의 감정이나 통찰보다 더 강할 수 있다.
통찰과 올바른 대처의 불능 사이의 불일치가 견딜 수 없게 되면, 사람들은 자신의 무저항을 정당화하려고 든다. 가장 뻔한 주장은 당연히 짐작되는 사회적 지위와 수입의 상실, 특히 가족에 대한 타격이다. 때로 문제는 간단히 무시된다. 공포에 주의를 기울이지 못한 결과는 잘 알려져 있다. 일터에서 죽음에 이를 만한 정신적 그리고 육체적 질병이다.
기관사와 트럭 운전사가 일을 해야만 하는 상황에서 받는 과도한 스트레스의 결과는 치명적 열차·자동차 사고를 낳는다. 철도 운행시간이 정확한 것으로 세계적으로 명성이 높은 일본의 경우를 예로 들 수 있다.
일본 철도 운행시간이 정확한 배경은 아주 드물게만 관심을 끌었다. 열차 기관사가 엄청난 사고를 냈던 2005년 4월의 사건 같은 때만 그랬다. 당시 기관사는 정해진 운행시간보다 90초 늦었기 때문에 허용된 것보다 훨씬 빠르게 열차를 운전했다. 기관사가 규정 위반 행위를 한 원인은 회사에서 징계를 받을까 두려웠기 때문일 수 있다. 만약 공포 때문이었다면 근거가 없는 건 아니었다. 노조 대변인은 회사가 의도적으로 공포를 사원들을 굴복시키는 수단으로 사용했다고 말했다.
지난 몇년 동안 수천명이 직장의 요구와 상사나 동료의 부당한 대우를 견디지 못하고 자살했다. ‘가로시’(과로사)라는 일본어에 대한 국제적 논쟁이 유행했을 당시, 과로사는 일반적으로 신중히 계획된 것이었다. 대부분의 경우 문제의 사람은 유서를 통해 견디기 힘든 근무 환경에 대해 불만을 나타냈다.
반면 때론 자신이 실패했다는 느낌과 계속 살아갈 수 없을 정도로 견딜 수 없는 수치심이 생기는 경우가 있다. 3주쯤 전, 프랑스에서는 49살 프랑스텔레콤 엔지니어가 더이상 쓸데없는 이야기로 고통받을 수 없다며 상사에게 소리친 뒤 칼로 자신의 가슴을 찔렀다. 프랑스텔레콤은 1990년대에 민영화되었고 시장 경쟁의 압력에 완전히 노출됐다. 하지만 공무원들의 자살률도 상당히 늘고 있다. 심지어 거기서도 사원들 사이 차별과 관련한 압박이 있다. 시장 경쟁은 공적 금융의 위기를 통해 전염됐다. 이건 노르웨이 공영방송에도 유효했다.
피아 베아테 페데르센은 공포를 느꼈고 이를 진지하게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삶을 위해 결심했다.
홀거 하이데 독일 사회경제행위 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