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추스리는 시간이 얼마나 필요할까. 슬픔에서 복구되는 상태라는것은 인간이 단언할수 있는 부분일까. 나는 이것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기도 하고 남기고 싶지 않기도 하다. 어떠한 단어들로 표현하기 어려운 고통이 아직도 내제되어있기 때문이다. 일상으로 돌아왔어도 평소처럼 출근하고 일을 하고 동료들이나 타인에게 웃는 목소리로 응대하는 평시가 지속되다가도 문득문득 떠오르는 기억이나 아쉬운 마음은 오솔길의 돌부리 처럼 순간순간 나의 발등을 스치며 고통을 상기 시킨다.
아버님이 소천하셨다.
3월 2일. 어느 오후.
2월 초입에 병원에서 선고 받았을 당시에도. 비록 전립선암 말기라고 할 지라도 여명은 대략 2년정도 예측할수 있다는 주치의의 말에 나는 절망하면서. 어째서 우리 아기가 유치원 졸업하는것도 보실수가 없는걸까 라는것을 울분을 토하면서 뇌까렸는데. 어째서, 고작. 한달이라니. 한달후라니 이건 너무 가혹한일이 아닐까.
고령이신 상황을 감안해서 1차 항암을 수술 이외의 방식으로 접근하면서도, 식사도 곧잘 하시고 평소처럼 외출도 하실수 있는 상황을 너무나 감사드리며
이렇게라도 지속할수 있다면 좀 더 기나긴 기간을 도모해 봐도 괜찮지 않을까 마음을 놓고 있었는데.
2월 마지막주 월요일은 갑자기 어린이집에 등원을 못하게 된 상황이라 시간이 난 김에 남편이 아기를 보고싶어하시는 어르신들에게 데리고 갔었다.
그때도 아마 통증이 있으셨을 것으로 추측한다.
요새 말이 트여서 온갖 수다쟁이가 된 우리 딸은 집안 곳곳을 누비며 앙증맞은 엉덩이로 할머니를 부비고 춤을 추면서 누워계신 할아버지의 손을 이끌고 하부지 일어나라고 했는데. 그날따라 컨디션이 안좋으셔서 자리에서 일어나실 수 없었던 아버님은 눈물을 흘리셨다고 했다. 너무 이쁘고 이쁜 그 모습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셔야했던 그 마음을
그때는 짐작하지 못하였다. 이제서야 느끼게 되는 아쉬운 마음과 슬픈 마음을 생각하며 나는 또 어찌할바를 모르게 된다.
그게 월요일이고.
복통이 심해지셔서 화요일에 응급으로 병원에 이송되셨다.
그저 복통이라고 생각하고 주치의를 불렀는데
또 하루지나니까 중환자실에 가시게 된다.
그때부터 나는 무서워졌다. 상황이 실감이 되지 않고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손가락 사이에 빠져나가는 모래알갱이들을 허망하게 바라보는 초조함처럼
통증이 발생되는 지점 (장루)에 관계된 의사는 그저 암때문이라고만한다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개복을 해야하는데
개복을 하시기엔 너무 고령이시고 컨디션이 좋지 않다 그리고 수술후 예후를 보장할수없다.
이 시발새끼들이 그런 소리만 하고 자기들은 모른다고 하니 가족들은 그저 애만 태우고.
봄 되면 나들이도 같이 모시고 가야지. 지난번에 포장해온 장어를 잘 드셔서 이번엔 좀 더 먼거리를 가실수 있으시면 식당에 모시고가서 온 식구가 맛있게 먹으러 가기로 했는데
매 주마다 우리 아가가 가서 온 집안을 누비며 할부지 할부지를 찾아다니며 숨바꼭질도 하고.
어머님은 아버님이 좀 더 나으시면 같이 지하철을 타고 먼거리까지 바람쐬러 가는것도 하시고 싶으시다고 했다.
정말 하고싶은것들 해야할것들이 너무나 많았다. 아직 하나도 시작하지 못했다.
그런데 수요일이 되니 병원에서는 임종 준비를 하라는것이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도 안되는 이야기인지 나는 꿈인지 어쩐지 이상하게 엇나가는 기억속을 배회하는것처럼 붕 떠있는 상태로
그저 엉엉 울면서 이건 말도 안된다는 소리만 해댔다. 그 순간에 남편에게 좀 더 도움이 되고 싶었는데
나는 아무것도 할수 없이 그냥 울고 또 울었다. 다른 방법은 없는건가? 정말 없는건가?
마지막 인사를 드리기 위해서는 지금 와야 한다고 해서 부랴부랴 남편을 따라 병원으로 갔다.
전체 식구가 여섯명인데 다섯명까지만 규칙상 허용된다고 해서 나는 혹시 못뵈면 어쩌나 불안해했는데
임종이란것은 다른 예외를 다 허용해주는거 같았다. 차라리 안되고 그냥 더 계시게 하는게 낫지. 그렇지 않은가. 병실 바깥에서 나는 너무 어려운 마음으로 순서를 기다렸다
의사는 어려운 말들을 해댔는데 길어도 일요일이라고 했다 나는 그때까지 정말 믿을수가 없어서 울면서 이건 정말 꿈인가에 대해 고민했다
한꺼번에 들어갈수도 없어서 두명씩 나눠서 갔다. 내가 오래 있으면 다음순서 (남편 동생내외)의 시간을 빼앗을수도 있다고 해서 거의 쫓기듯이 갔다
그 많은 침대 사이에 앉아계신 아버님은 나를 보자마자 우리 아기의 안부를 찾으신다.
전날에도 혼수상태셨는데 아기 이름을 듣고 눈을 뜨셨다고 했다. 그 마음은 정말.. 너무나.
나는 멍청이같이 울기만 했다. 그냥 죄송하다고. 감사했다고. 너무나 감사했다고
아버님은 내 얘기를 들어주시는듯이 계속 고개를 끄덕이셨다 나는 놓칠까봐 손을 붙잡고 계속 울기만 했다.
그리고 내게 고맙다고 하셨다. 고맙다고.
내가 뭐 해드린게 있나. 근데 고맙다고 하시니 나는 더 마음이 무너지고 속상했다.
내 얼굴도 잘 보시고 말씀도 잘 하셨다 중환자실이라 장갑을 끼고 손을 잡았는데 손도 예전처럼 말랑하셨다 많이야위셨지만
너무 순식간에 뵙고 나왔다. 그게 마지막이였다.
나는 너무나 또렷하신 얼굴에 일요일까지라도 (아니 그 이상이라도) 더 계셔주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다음날 아침부터 걸려온 전화는 마음을 더 무너지게 했다.
의식이 없으시다. 그리고 오늘을 넘기기 힘들거라고 했다.
두어시간사이에 한번씩 전화벨이 울릴때마다 심장이 무너지는거 같았다.
나는 정말 어떻게 해야하지.
마지막 오후에 전화를 받았을때 남편이 하늘에 가셨다는 얘기를 했다. 믿을수가 없다.
전화를 받으면서도 이게 진짜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회사에서 어떻게 일을 한건지 어떻게 나온건지 정신이 하나도 없다.
부랴부랴 집에 갔더니 어린이집에서 돌아온 딸래미가 맘마를 먹고 있다.
내가 일찍 오니 신나서 뛰어나온다.
그 어여쁜 미소를 보니 더 마음이 무너질거같았다.
할아버지. 라고 말을 꺼내니까 딸래미가 '할부지 아야' 라고 한다.
지난번부터 편찮으신것을 얘기했더니 아야 라고 하면서 호오 부는 시늉을 해준다.
그 말을 듣고 참을수가 없어서 끌어안고 또 멍청이같이 엉엉 울었다
좀만 더 계시다 가시지. 애기 더 보고 가시지 그렇게 사랑하는 애기들 자식들 더 보구가시지.
장례식장에 들어가면서 보는 사진에 또 마음이 무너져서 울다가
정신없이 지나가는 손님들을 치루고 하는 하루에 다시 또 멀쩡해졌다가
지나다가 가끔 보이는 영정사진을 보니 또 기가막혀서 눈물이 나오다가.
입관하실때 뵈었던 머리카락이 예전이랑 너무나 똑같아서 또 참기 힘들다가
영정사진으로 쓴 사진은 작년 돌잔치할때 내가 찍어드린 사진이다.
평소에 어르신들은 사진을 별로 안찍으시는데 그 사진은 아기를 보시는 표정이 부드럽고 평온하셨다.
그래서 남편은 그 사진을 영정사진으로 하고싶다고했다.
내가 그 사진을 찍을때만해도..이 사진이 이렇게 쓰여지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지
그 말도안되는 상황에 또 마음이 아파서 눈물이 나왔다
카카오톡을 보다가 내가 보내놨던 아버님의 그 사진들을 보면서 아쉬워서 또 눈물이 나왔다.
입관실의 아버님은 너무나 작아지셨다. 내가 기억하던 그 단단한 풍체가 아니셨다.
너무나 마르고 작아지셨던 몸.
화장을 끝내고 작은 항아리를 받아들었을때 더 마음이 무너졌다.
남편은 울지 않을거라는 다짐과 다르게 많이 울었다.
나는 남편을 생각하며 더 많이 울었다. 그사람이 너무 안쓰러워서. 그 지난 시간과 쌓여있는 마음들이.
내가 할수 있다면 더 큰 품으로 그사람을 끌어안아주고 슬픔을 내가 흡수해주고 싶었다.
그저 끌어안고 등을 어루만져 주는것으로도 일부라도 내가 가져올수 있었을까. 아직도 그 어려움을 짐작하지 못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시간이 끝나도 남은 사람들은 이어가는 시간 속에서 현실을 또 살고 버틸수가 있다
그 단순한 매커니즘속에도 간헐적으로 치밀어오르는 부재감과 안타까움은 그림자처럼 남아있다.
아쉬움이 너무 많아서. 조금만 더 시간을 주셨더라면 더 많은 기억과 추억을 같이 남길수가 있었다면
어머님은 마지막에 집에 계실때 아버님에게 음식을 해주셨던게 혹여 잘못된 영향을 주었던게 아닐까 염려하셨는데
그 마음이 너무 슬퍼서 또 마음이 아팠다. 정말 그건 아닌데. 오히려 그 시간에 맛있는 것들을
같이 드시고 누렸던것이 더 행복을 드렸을꺼라고 나는 정말 내가 할 수 있는 한 깊고 진심을 담아서 말씀드리고싶었다.
비록 나는 해드린게 없지만. 더 아쉬운 마음만을 간직하고 있지만 더 많은 시간속에서 어머님이 감내하셨을 고통이나
또는 다른 사유들은 내가 또 어찌 단어로 형언할수 있겠느냐만은 정말 그분은 모든것을 다 해서 최선을 다했으니 아픈 마음을 접어도 되실거라고.
그저 안타까운건, 오랜시간을 삶에 치여서 살아가셨을 그 무게들과.
아기를 더 오랜기간 만나고 싶어하셨을 그 안타까운 마음들을 내가 어찌 해드릴 수가 없었던게 안타깝고 죄송스러운 마음들뿐.
3/12은 우리 딸래미의 두번째 생일이였다. 딱 1년전엔 아버님 어머님을 모시고 메이필드 호텔에 가서 식사를 하고 사진을 찍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그때엔 아버님이 그렇게 좋아하시는 약주도 드시고. 돌잡이를 찍어놓은 영상속에 아버님의 웃음소리가 있다.
행복하고 즐거우셨을 그 시간이 못내 아쉽고 또 그립다.
어제 우리 딸을 안아주며 할아버지가 하늘에서 꼭 지켜주실거라고 이야기를 해줬다.
모든걸 기억하기엔 너무나 어린 아이지만
그래도 정말 너무나 많이. 정말 많이. 온 힘들 다해서 너를 사랑해 주셨다고. 그 마음 하나를 꼭 간직해 주었으면 한다.
그 동안 많이 아껴주시고, 사랑해주시고, 배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너무나 감사합니다.
그리고 해드린게 없어서 죄송하고 또 죄송합니다.
그저 감사하고 또 죄송한 마음뿐이에요.
부디 이제는 아프신곳 없이 자유롭고 평안하시기를
내세에 꼭 기회가 된다면 다시한번 더 뵙고 싶어요.
모든 가족들의 건강과 행복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이 덜 아프고 마음 평안하기를 지켜주세요
감사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