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4일

아이 2009.07.09 00:40 read.310

 

 


1.
생각지도 않았는데 꿈에서 녀석을 보았다. 바닷가 인듯 싶다. 물이 보인다기 보단 짭쪼롬한 바람의 내음으로 '아 여기가 바다인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주변은 휑하고 나는 바닥에 자리를 깔고 누워있었다. 나른한 햇빛이 누워있는 내 이마며 뒤짚어놓은 손바닥이며 벌려놓은 다리에 느럭느럭하게 내리쬐고 있었다. 그 강렬한 나른함에 나는 온 몸을 옴짝달싹도 할수 조차 없었다. 누군가가 저벅저벅 내 쪽을 향해 걸어온다. 모래바닥의 살캉거리는 소리가 등으로 느껴진다. 누굴까,상대를 감지하기 위해 눈꺼풀을 무겁게 들어올린다. 강한 역광에 상대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지만 익숙한 냄새가 후각을 밍숭하게 감아올리며 뇌에 기록을 상기시킨다. 인위적인 단내, 이건 녀석이 좋아하는 바나나맛 사탕의 향이다. 내가 싫어하는 사탕의 냄새.나는 마치 파블로프의 개처럼 후각이 근접하는 반경에서 그 향을 느낄때마다, 싫던 좋던 녀석의 존재를 상기해야 했다. 이건 내게 그다지 유쾌한 일이 아니다. 지금또한 - 비록 꿈이지만, 더군다나 나는 이게 꿈이라는 사실 또한 인지하고 있다 - 누워있는 내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 보는 사람이 녀석이라는것을 눈을 감고 있어도 알게 되버리는 것이다.


L. 내 이름을 드문드문 부르는 목소리에 슬며시 눈을 떠서 녀석을 쳐다보는데 그림자에 묵묵히 지어있는 녀석이 표정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근데, 나는 녀석이 울것같은 표정을 짓고있다고 강렬하게 느낀다. 피로감이 급습해 오지만 또 본능처럼 자리에서 일어나셔 녀석을 불러 세운다. 아니 불러 세우려고 하는데 갑자기 벙어리가 된것처럼 내 입에서는 아무런 음성이 터져나오지 않는다. 입을 벌릴때마다 공허한 침묵만이 성대를 진동시킨다. 나 말을 못하는거야? 그런건가? 정색하며 방방 뛰어도 모자를 판인데, 내게 집중되는건 오로지 '울것같다'라고 느껴지는 녀석의 표정이다.


미안해. 녀석이 떨구는 눈물이 앉아있는 내 뺨을 적시고 타고 흘러 까슬한 모래바닥에 떨어진다. 차갑다. 마치 녀석을 처음 만났을때 잡았던 녀석의 서늘한 손처럼 춥다. 차갑다. 나는 멍하니 녀석의 눈물을 비처럼 맞는다. 녀석이 드문드문한 걸음으로 내게 다가온다. 피곤하다. 너무나 피곤하고 졸립다. 녀석이 품 안에서 반짝하는 칼을 커냈다. 섬뜩한 빛이 날을 타고 흘러 내 가슴으로 향했다- 아아, 순간 숨이 헉 막힌다. 녀석이 칼로 나의 가슴을 찔렀다.


미안해, 미안해. 녀석은 칼로 내 가슴을 조금조금씩 도려내며 연신 울어댔다. 나는 얌전하게 엄마를 기다리는 여섯살 유치원생 소녀마냥 가만히 앉아서 녀석의 벌벌 떨리는 뺨을 붙잡는다. 나는 괜찮다. 나는 괜찮어. 이 한마디를 해주고 싶은데, 여전히 내 목에서는 윙윙 바람소리만 나온다. 엉엉 울어대는 녀석을 나는 가만히 두 팔로 안는다. 내 가슴팍에서 삐죽삐죽 흘러나오는 피가 녀석의 옷을 적신다. 미안해. 미안하다. 이제사 겨우 터져나오는 내 목소리. 미안해, 내 피가 녀석의 옷을 잔뜩 적셔대는걸 느끼면서도 나는 팔을 풀지 못했다. 미안해, 미안해. 미안하다. 나어린 여자아이처럼 나도 엉엉 울어버렸다.



희멀건한 천장이 조금조금씩 눈에 밟힌다. 빛이 얇게 스며있는 하얀 면적이 보이자 나는 금새 안도했다. 돌아왔다. 그 시덥지도 않은 꿈에서 나는 다시 현실로 나왔다. 습관처럼 나는 손가락을 더듬더듬 올려 볼을 매만진다. 축축하다. 울어버린건 꿈이 아니였던걸까, 따끔 따끔한 목구멍의 통증이 느껴진다. 서늘하게 가슴이 움찍거린다. 이 통증 또한 꿈이 아니다.


" 미안해, 미안하다. "


잔뜩 쉰 목소리로 나는 또 녀석에게 사과를 했다.






2.
바스라질것같은 L의 마른 어깨를 더 좀 더 깊게 끌어안았다. 터질것 같은 눈물을 꾹꾹 참는다. 울어버리면 안된다. 나는 아무것도 해준게 없는데 고작 이 작은 고통의 벽에서 주저 앉아 버릴수는 없지 않은가. 이런것 따윈 참을수 있다. 하지만, 이 마음은 참아지지가 않는다.



좋아해.
좋아한다.



들리지도 않을 괴로움을 까마득하게 던져버리는 내 외침이 거칠어진 나의 내면에서 휘몰아친다. L을 더 힘껏 끌어안았다. 달콤하게 배어나오는 L의 익숙한 체취에 나의 비어버린 숨을, 마음을 채운다. 갈곳 없는 내 마음이 넓은 대지를 휘돌다 굶어 죽어도, 나는 이 모든것을 버릴수가 없다. 좋아한다. 다시한번 더 단단하게 껍질을 둘러 감정을 토로한다. L에게 닿아지지 않아도 바스라지지 않게 외벽을 더튼튼하게 쌓아올린다. 타인으로 향한 감정에 상처받은 그가 혼란스럽지 않게, 나의 덜 익은 마음을 보아서는 안된다.



지금의 내게 L은 그 자체의 의미. 그 이상의 강렬한 의미를 사랑이라 말할수 있을까? 간단하게 헤아릴수가 없다. 그 의미를 다 받아들이기엔 아직 난 서툴고, 내 감정 또한 완성되지 못한 반쪽자리에 불과하다. 나는 그저 그가 아프지 않기를, 그가 울지 않기만을 바란다. 내 마음이 그에게 조금이라도 다른것을 던져준다면 나는 절대로 내 마음을 그에게 보여주지 않을것이다.



L의 목덜미에 얼굴을 뭍으며 메마른 공기를 들이마신다. 이제야 겨우 살것 같다. 더 많이 더 깊게 오랜 시간을 버티기 위해 L의 체취를 끌어당긴다. 그리고, 이 결핍에서 해방되지 못할 내 열여덞의 사랑을 담담하게 인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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