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ommate

아이 2011.05.07 15:13 read.297






1.
발바닥을 고슬한 모래바닥에 부볐다. 기다리는 시간은 몸퉁이를 잘린 케이크 처럼 겉이 까슬하게 굳어져간다. 아스팔트 기둥에 고정시켜놓은 엉덩이를 부스스 추켜 세우고 벗어나는듯 싶다가도, 노곤함이 뭉친 다리가 힘이 풀려 주저 앉았다. 가방에 함수학 전공책을 넣어 오지 않은게 다행이다. 얇은 전선을 더듬거리며 올라오는 노래는 벌써 몇번째 인건가. 가락이 질릴만큼 입에 씹혀도, 손등의 피부가 추위에 알싸하게 꿈틀거려도, 몸을 일으킬수 없다.


괴상한 심보다. 짤랑이는 열쇠는 가방 한 구석에, 손을 집어넣어 잘만 훑어대면 다른 물건들과 뒤엉켜 나뒹굴고 있는 그것을 잡아챌수 있다는걸 10% 즈음은 예상하고 있으면서도 가방엔 손도 대지 않는다. 그저 기다린다.


열쇠로 문을 따고 들어가 꽁꽁 얼어버린 방을 두런히 돌아다니며 서린 쪽문을 열어 큼큼한 공기를 환기시키고, 찬물 더운물 엉성하게 섞인 물로 소세를 하고, 바닥에 대충 벗어놓은 티셔츠들을 걸쳐 입고는, 미처 가시지 않은 축축한 습기가 보일러의 온도에 느릿하게 증발하는것을 등짝으로 생경하게 느끼며 뒹굴거리다가 스르륵 잠이 든다.

기록되지 않는 수면의 터널을 지나고 나니, 또 다시 찾아온 아침. 느리멍텅하게 눈을 뜨면, 내 몸뚱이는 마룻바닥이 아닌 사각거리는 침구에 둘러쌓여있다. '바닥에서 자면 입돌아가'라는 그 어울리지도 않는 잔소리질을 늘어놓으며 이마 주름을 툭툭 (세상에서 내가 제일 싫어하는데도 들어처먹지도 않고 꿋꿋하게 해대는) 건드리는 손가락은 없다. 바지런한 아침 아르바이트를 가면서도, 잊지 않고 '아침은 꼭 먹어'라 적어놓은 쪽지가 음식이 가로놓인 하얀 배냇보 위에 가만히 놓여있다. 그 정갈함에 되먹지 않은 빈속이 요동친다.


더듬더듬 팔뚝으로 기어나가, 그 앉은뱅이 탁자에 놓여있는 토스트 한조각을 입에 쑤셔 넣었다. 물론 바닥에 배를 눕힌채로, 맛이 있는지 없는지 뉴런에 전달되지도 않는 비몽사몽인데도, 나는 꿋꿋히 바닥에 누어 천당에 대롱대롱 메달린 전구를 반찬삼아. 부득부득 토스트를 다 먹어치웠다.


일주일이 이런 식이였다. 차려놓은 아침을 먹고, 학교에 간다. 방학은 아니니까, 수업이 있으나 과가 다르므로 학교 안에서 마주치는 일은 거의 없다. 하다못해 학교 식당에서 밥숟가락 들다가 인사하게 되는 일도 없다. 일과가 끝나면 삼삼오오 끌려 들어가는 술자리, 당구장, 이곳저곳을 하릴없이 기웃거리가다 느지막하게 집으로 돌아온다. 아침에 너저분하게 늘어놓고 간 협탁의 그릇이며, 빨래들은 언제 그랬냐는듯 깔끔하게 정돈되어있다. 형체없는 우렁각시가 있는거 같다. 멍하게 앉아 시끌벅적한 TV 채널을 몇개 깔짝거리다가, 스스럭 잠이 든다. 그리고 눈을 뜨면 또 이불에 돌돌 쌓인 누에고치처럼 '혼자' 누워서 아침 햇살을 맞이하는 것이다.


물론 생활사이클이 다르면, 같은 집에 살아도 얼굴 조차 보기 힘든건 어쩔수 없다. 피 섞인 가족도 그러한데, 하물며 핏 방울조차 안섞인 룸메이트는 오죽하랴. 그러니 이상할거 없다. 그런데,


일주일째 되는날, 토스트를 억세개 씹어대다가 더불어 씹혀버린 아랫입술을 부여잡으며 괴이한 자각에 사로잡힌다. 엄습하는 사고의 팔할이 식어버린 토스트의 염분처럼 딱딱하게 뒤엉키고 있음을.


쓸데없는 습관을 길러놓았다. 이렇게 메몰찬바람이 물어닥치는 대문앞에 이유없이 쭈그리고 앉아 있노라니 먹이를 주지 않으면 몸을 일으킬 수 없는 멍멍이가 된 기분이다. 사육받고 있는 것 처럼.

추워. 우연한 접선이 자연스러운 시나리오지만, 미친듯한 추위에 인내심이 바닥나버렸다. 참다 참다 끝내 구겨넣은 전화를 찾기 위해 가방에 손을 뻗고 말았다.


- 어.


시끌럽게 달아오른 주변 소음을 알갱이 처럼 메달고, 쿠션감이 좋은 목소리가 걸어들어온다.


- 어디야.
" 집. "
- 밥은 먹었어?
" 아니. "
- 왜?
" 어데고. "
- 나? 여기 홍대.
" 거서 뭐 하는데? "

둘둘 말려 들어오는 추위에 소화되지 못한 퉁명함이 튀어나온다. 그것을 듣고 웃음소리를 나지막하게 콧등으로 삼키는 것이 느껴졌다. 더더욱 속이 뒤틀리고. 그걸 내색한 속이 창피해졌다.

- 그러는 넌 뭐하는디


내가 내뱉는 남도의 방언을 어설프게 따라하며 묻는다. 얄미운 인간.
옆에서 유난히 하이톤에, 흥겨운 감정이 극도에 치닫은 여자아이의 호들갑이 터져나왔다. '여자친구 전화 받는다!' 안돼. 꺄악. 취기에 달아오른 과도한 리액션들이 넘쳐난다.


" .. 지랄들은. "
- 뭐라고? 잘 안들려.
" 아 추워 뒈지겠다고. "
- 집이라며?
" 알게 뭐야. "


춥다 라는 온도를 입밖으로 꺼내니, 정말 참을수 없으리만큼 체온이 내려간다. 자연스러운 접선이고 뭐고, 속이 잔뜩 뒤틀리고 추위에 얼어붙어 버린 나는 굳은 다리를 쭉 피며 투덜거렸다. 시발 다시는 토스트 따윈 먹지 않을거야. 내일은 라면을 끓여먹을거다. 꼭 내 손으로 끓여먹고 가야지. 보란듯이 냄비는 뽀득뽀득하게 설겆이까지 싹 해서 널어놓을꺼다.  

" 니 면상 볼라고 집 앞에서 기다린다고 와?
  됐고, 넌 그냥 술이나 처마셔. 난 가서 잘란다. "
- 어? ㅇ-

이응의 끄트머리가 찰칵 끊겼다. 괜한 고소함이 입술 끝에 메달린다. 우릉우릉 진동을 털어내는 전화기 껍질에 익숙한 이름이 초롱하게 떠오르지만 간단하게 종료를 누르고 상황을 정돈시켰다.

손을 내 뻗어 바닥에 바닥까지, 책과 책 사이를 뒤척인 끝내 찾아낸 비상키로 겨우겨우 따고 들어온 집 안은 여느때와 다름없는 '하나'만의 쓸쓸한 적막과 어두움일 뿐이다. 조금 익숙해 질려고 하는게 싫어서. 신발을 벗자마자 TV의 전원을 켜 놓고 소리를 커다랗게 부풀려 놓았다. 구석구석에 앉아있는 소리의 부재를 모두 빼앗아 버릴 만큼 크게.


매캐하게 차오르는 퉁퉁함에 언짢음이 쉽게 털어나지 않는다. 추우니까, 이건 추워서 그러는거라고. 그냥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속 편하게.







2.
" 술처먹었으면 곱게 잠이나 잘것이지 자는 사람은 왜 깨우고 난리고? "
" 잠 깼어? "
" 아, 안깼구마. 잘거야. 건들지마."


심통난 시어머니 처럼 등을 돌려 누워버렸다. 잠들기 전에 작동을 잊어버린 보일러 탓에 바닥은 여전히 냉골. 그 위에서 널부러져 잠 들던 나도 냉골. 어깨춤이 으슬으슬떨린다. 하지만 등짝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눈에 뜨이고 싶지 않아 꾹꾹 참고 뻣뻣하게 버티고 있다.

" 인나봐. 인나봐아 "


풋한 술냄새가 또 코끝을 지릉지릉하게 맴돈다. 머리가 지끈지끈 쑤신다. 입이며 눈이며 코며 죄다 닫고서 잠이라도 잤으면 싶다. 두어시간 바깥에서 오들오들 떨었던 여파가 이제서야 몸뚱이에 내려앉는 모양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기다렸던 '인간'의 얼굴을 마주하고 싶다는 마음도 있다. 원래는 책상다리 앉고 딱딱하게 이마를 굳히며 '이유'에 대해 시덥지도 않은 토론을 하려 했던거지만. 이렇게 포장하나 저렇게 포장하나 어째 구실이 신통하지 않다. 그래서 더 속이 뒤틀리고 심통이 솟는다.


" 우리 술마시자. "


나는 이 웃는 얼굴에 너무 약하다.


겨드랑이 안에 곰실거리며 파고들어와 가슴팍을 끌어안은 팔에 별다른 저항 없이 순순히 몸을 일으켰다. 어린 아이 달래듯이 구는 양에도, 입만 내민채 얌전히 앉아있다. 이 인간은 그런 내 머리를 부스스 헤치고는 사들고 온 것들을 앞에 쭉쭉 꺼내놓는다. 뭐가 신나는지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 그러고 보니 우리 일주일만에 얼굴 보는거다."


새삼스러운 반가운척을 하는 말이 사내새끼답지 않게 낮간지러워서, 남도 태생의 혈통으로 참을수 없는 쑥쓰러움에 몸을 벅벅 긁는다.

나는 상대에 대한 반감, 혹은 설득따위의 필요가 존재하지 않는 이상 시선을 맞추려는 것이 어색하다. 반면 이 인간은 이야기 할때 눈을 마주하지 않는건 상대에 대한 예의가 부재한 다던가 의도를 은폐시키려는 화자의 음흉한 마음이라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이렇게 사소한 사고방식의 부분부터 다른 이들이 같은 집에서 부딪치며 살수 있는 것일까? 불가능하다 여겼으나 별 트러블없이 1년을 보냈다. 참으로 신기한 노릇이다.

" 나 왜 기다렸어? "

이것봐라. 이렇게 쓸데없이 직설적인 성격같은것도 싫다고.

" 누가 기다렸다고 그러나. "
" 너 아까 전화에서 그랬잖아. 면상 볼려고 기다린다고 "
" 그런적 없다. 취해서 헛거 들었나. "
" 아, 뭐야. "

쪼륵쪼륵, 날 추워죽겠는데 찬 맥주는 사와서 어따 쓸려고. 하여튼 센스도 없어요. 궁시렁궁시렁. 첫 음절부터 끝 마침표까지 투덜이 스머프처럼 티나는 염불을 외어도 화 한번 안내고. '그럼 가서 소주사올까?'라며 묻는 선한 얼굴에 할말을 잃었다. 이러니 못된짓 하는거 없이 팥쥐가 되는거 같지. 또 돋아난 심술 세포에 한캔 뺏어서 물 처럼 벌컥벌컥 들이켰더니 정말 뼛속까지 얼어붙어 버렸다. 덕분에 반쯤 잠에 담구어 있던 척추에 정신이 왈칵 든다.

so many people use your name in vain. 눈을 감고 어디선가 줏어들었던거 같은데 반사적으로 떠오르는 가사를 흥얼거렸다. 겨울 바람에 바깥 창문이 달캉거린다. 깨어있으나 새근거리는 숨소리는 아마도 깊은 술을 마시고 온 이의 것이리라. 이유없이 새초롬해지던 기분이 힘없이 뭉특해진다.

이마에 서늘하게 닿아지는 손길에, 놀라지도 않고 눈을 가만히 떴다.

" 열난다 너. 아까 오래 기다렸어? "
" 아니. "
" 머리 뜨거워. 입술도 갈라졌고. "

이마에 늘러붙어있던 손이 이제는 빡빡하게 마른 입술 언저리에 닿아있다. 목이 따끔따끔 한것이, 말처럼 정말 감기라도 걸린것 같다. 보이지 않는 미세한 구멍이 생겨서, 힘이 줄줄 새어나간다. 이렇게 앉아있는 난 껍질만 있는것 처럼. 그래서 그냥, 이마를 만지고, 볼을 쓰다듬고, 입술을 검지로 살살 문지르는데도. 별 소리 안하고 얌전히 앉아있다. 평소같으면 치아라 마. 하고 훼를 쳤을텐데.

그럴인간이 안 그러고 있으니까. 저이도 이상하다 싶은지, 잘근하게 움직이던 손길이 멈추고 나를 바라본다.

" 치워. "

그러니 이제서야 손을 거두고, 조용히 웃는다. 눈가가 가늘게

" 웃지마. "
" 왜. "
" 마음에 안드니까. "

세워 앉은 무릎에 열기가 꿈틀거리는 이마를 내려놓았다. 일주일 만에 보는거다. 우리. 목 안을 뒤엉키듯 맴돌던 그것은 내가 먼저 꺼내려 했던 말이다. 동동거리는 발을 바닥에 움키며 어둠이 서린 골목에 있던것 또한 나 였고, 전화를 들어 이름을 부른것도 나 였고, 토스트를 먹으며 일주일을 연명했던것도 나 였으니까,

기쁘지는 않아도 먼저 고맙다는 말을 했어야 했다. 다른 이유를 떠나서라도. 나는 못되먹긴 했지만, 나쁜 사람은 아니다. 근데 자꾸 이 인간앞에선 세상에서 최고로 나쁘고 못되먹은 꼬마애가 된다. 이건 저이 탓도 아니고, 그렇다고 내 탓도 아니다. 사실 내 탓이긴 하지만 100% 내 탓으로 돌리기엔 억울하다.


" 형. "


쪼그리고 앉아 웅얼웅얼 부르는 말에, 뒤통수를 살근살근 덮는 손. 묵직하다. 근데 무거운데 따뜻한 솜이불 같다. 달래는 손바닥이 아이 어르듯 곰질거린다. 잠이 들것만 같다. 이것도 이상하지. 같은 인류, 키가 겅충하게 큰 남자의 손에 위안을 받고 있다. 아침을 꼬박 하릴없이 먹여대는것때문에 턱끝까지 불만이 차올라 퉁퉁거리면서도, 손바닥 아래에서 쓰다듬을 받고 있다니, 배고픈 짐승 같이 굴지 말라 다짐 해놓고선.

" 나 여자 사귈까봐. "


어지러움이 반쯤 가라앉은 이마를 더 많이 깊게 가라앉혀 놓는다. 의식은 잠의 저 편에 몽롱하게 스며들고, 집과 또다른 '것'에서 닿아지게 되는 익숙한 공기와 촉감에 다른것들을 가져오지 않으려 한다. 끈적하게 들러붙은 생각들도, 다음날에 '혼자' 마주하게 될 하얀 천장도, 아마도 형이 아침 아르바이트를 때려치지 않는 이상 계속될지 모를 이 사이클도, 아니 나와 형이 같은 집에 사는 동안에는 벗어날수 없는 '주는자' 와 '받는자'의 불평등한 관계도.


" 으으, 외롭다. "


잠시 멈춰있던 손이 뒷머리를 지나 어깨와 목덜미 사이에 이불처럼 얹혀있었다. 곰실거리는 움직임이 멈추니, 차가운 공기가 손바닥의 틈새로 밀려 들어온다. 어깨를 움츠리며 고개를 들었다. 마주친 눈이 투명했다. 어떤 대꾸도, 반응도 없이. 빛이 있다면 그대로 투과될수 있을것만 같은 그 얇고 얇은 푸른공간. 그 '세계'속에서 나만이 갖고 있는 간지러운 들꽃이 포자를 뿌린다.


이름을 부를수 없는 그것.


이렇게 마음에 또 한겹의 퇴층이 쌓여간다.







3.
전화를 걸어 늦을거 같으니 미안하다고 했다. 몹시 후덜거리는 말투에 형은 더 당황한듯 했다. 괜찮다고, 약속한것도 아니고 일이 생겨서 그런건 어쩔수 없지 않느냐. 별것도 아닌 일에 신경쓸 필요 없다고 한다.

나름의 위로라고 건넨말인데, 왜 나는 또 몇가지 구절에서 이상하게 마음이 걸려버려서 떨떠름해지고 만다.


" 아 젠장 요새 왜 이렇게 계집애 처럼 구는건지 모르겠다. "
" 누가? "
" 에이씨. "



형이 내 이름을 부를때, 형이 내 머리를 쓰다듬어 줄때와 같은 사소한 일상에서 부터. 고향에서 올라온 직후에도 느끼지 못했던 '향수'가 더 강렬하게 침투하기 시작했다. 묘한 그리움이 가져오는 허전함. 그것이 무엇이던가, 그것이 어떤것이던가. 이질적인 것을 파악하려고 하는 본능적인 움직임이 계속 그것을 관찰했으나.

흐릿한 붉은빛을 띄고 북쪽, 남쪽, 등지를 떠돌고 있는 그것의 발자국만 보일 뿐아무것도 닿아지지도 만져지지도 않았다.



형이 나를 익숙하게 생각하는것 만큼, 나 또한 형을 익숙하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게 우리의 뒤에 놓여있던 1년의 시간이다. 지나치게 다정하여 타인에게 거리낌없이 곁을 내어주기까지 하는 형의 친절병에 힘입어 우리의 1년이 채워졌다는건, 다른 언어들을 꺼내놓지 않아도 알수 있는 '사실'이였다. 나는 그 점을 몹시 고마워 했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당연하다 생각했던거 같다. 나는 형이 얹어주는 조건없는 애정을 댓가없이 받아먹었다.


무료시식하는 노숙자도 그렇게 뻔뻔하지 않을텐데.
그래서, 이상하고 모호하게 덜컥거리는 이 '흐름'이 마음에 들지 않는거다.


따지고 보면 그건 형 탓이 아니라, 내 탓인데. 나는 언제나 그렇듯 이 일의 모든 근원지는 내 손이 아닌 형의 손에서 이루어진 것이라 단언하고 스스로 합리화시켰다.





4.
스물한해를 살면서 반드시 해야하는것. 해야하지 말것들은 다른 이들에 의해 결정되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대학에 들어가야 했다. 이것은 본디 선택사항으로 간주되었던 것이나, 나 처럼 특별한 방안이 없는 한 당연한 수순으로 받아들여졌다.  

연애란것도 이런식이다 인간은 때가되면 이성을 만나고, 때가 되면 섹스를 하고, 때가 되면 아이를 낳는다. 나도 별 다른 대체방안이 없다면 그렇게 될 것이다.


혜진이 양 볼을 붉히며, 평범하게 흘러가던 자신과 나의 관계를 '더 깊은' 곳으로 이끌려고 할때 나는 다른 이들이 말하는 '두근거리는 감정'이나 타인이 나를 좋아함으로 인해 얻어질수 있는 '사소한 자존감'따위를 느낄수 없었다. 오히려 나는 그 어색한 상황을 무슨수를 써서도 벗어나고 싶다는 본능적인 거부반응에 몸서리를 쳤다. 혜진이 아니라 어느 다른 이더라도, 내게 그런 이야기를 하게 된다면 또한 나는 풀숲에 몸을 숨기는 토선생처럼 날뛰었을 것이다.


" 연애 꼭 해야하나? "

턱에도 못 미치는 어처구니 없는 말을 들은 성직자처럼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현성이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 연애를 꼭 해야하냐고? 그걸 말이라고 하냐? "

초등학생 아들이 멋 모르고 내뱉은 말에 경악을 금치 못하는 엄마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의자를 끌어당겼다.

" 세상만사 만물, 하느님이 창조하신것중에 탑시드가 뭐냐. 바로 인간 아니냐? 다스리기도 귀찮은데 굳이 인간을 하나가 아닌 두가지 종류를 만들었냔 말이다. 다 이유가 있는 벱이지. "
" 얼씨구. "
" 옛 어른들께서 음양의 조화가 천지만물의 근원이요. 하다못해 짚신들까지 짝을 지워야 한다 가르치셨다. 뼈가 삭는 외로움을 절단내는것도 연애질이요. 푸릇푸릇한 크리스마스에도 인간을 구원하는것 또한 연애질이라는게 천연의 진리이건만. 근데 지금 그 자연의 섭리에 쓸데없는 토를 다는것이냐? 한낱 미물 주제에? "
" 아, 시발놈아 밥풀튀어 "

조각난 밥풀이 내 식판까지 침입하는걸 털어냈다. 그 모양새가 더더욱 입맛이 달아나서 대충 휘젓다만 수저를 내려놓고, 그대로 반납대에 밀어넣으니 더더욱 경악하는 표정으로 등짝을 후린다.

" 음식 남기면 벌받아 임마! 하여튼, 사내새끼가 입은 짧아갖고. "
" 그것도 인간의 덕목에 포함되냐? 남자는 밥을 많이 먹어야 하고. 스무살이 넘으면 연애를 해야하고? "

더 앞에서 뻐팅기다가 얻어맞을것 같아 잽싸게 문 밖으로 먼저 내뺐다. 그 뒤를 긴 다리로 성큼성큼 쫓아오는 녀석, 한참을 실갱이를 하다 힘에 부처 화단 근처 돌 위에 쪼그리며 걸터앉았다.

담배를 내밀었더니 고개를 젓는다. 혼자피면 맛이 덜해서 피우는 손을 내려놓는다. 시계를 보니 다음수업까지 남은 시간은 얼추 30분 정도. 할일 없는 얌생처럼 교정을 타박타박 걸어간다. 밥을 먹었는데도 기운이 나지 않는다. 섭식활동에서 까지 에너지를 얻을수 없는 상태라니 골로 갈 날도 멀지 않은 모양이다. 입이 써서 달큰한걸로 채우려 캔커피를 샀다.

" 혜진이 정도면 괜찮지. 천하의 정지운이 버진을 가져가는데 여신급은 아니더라도 여신 비서 정도는 되겠다? "

입에 물고있던 커피가 분무기 처럼 뿜어져 나왔다.


" 너 이 바닥에 떠도는 말이 딸치기보다 빠른거 모르냐? "
" 헐. "
" 너 걔 거절하면 사대문 안에 사지 도륙되서 전시될거같더라 "

대충은 예상하고 있었지만, 이런식으로 피드백을 당하니 절로 한숨이 되직하게 터져나왔다.

현성이 말하는 연애의 필요성이, 내가 이야기하고 있는 외로움 해소의 필요성과 함께 상쇄될수 있다는 확신같은것은 없다. 모든것은 타인의 경험에서 비롯된 추측이다. 연애를 해야한다는것, 누군가를 만나야한다는것,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별다른 거부반응이 들지 않는다면 거절할 이유가 없다는것 외엔.

혜진이 상냥하고, 착하고, 예쁘고, 귀엽고, 또 뭐더라. 사람이 갖고 있는. 그러니까 하나의 인간. 호불호를 나눌수 있는 이성이 갖고 있는 최 상급의 긍정적인 조건을 모두 나열해도 어긋나지 않는다는것을 안다. 그 일이 있은후 다수는 나의 어깨를 두들기며 '저 아이는 참 좋은 아이다'라는 점을 하나같이 설파하고 있다는건. 그 만큼 그 아이가 갖고 있는 인간적 장점을 반증하는 것이겠지. 물론 '친구'로서 지내는 시간동안 그 점에서는 그런 말들이 부재하더라도 나는 충분히 설득당할수 있었다. 혜진은 좋은 사람이다. 연애하는데 나쁘지 않은.



5.
공기를 하얗게 갈라놓는 옷자락을 바라보았다. 조명이 반사된 미세한 먼지들이 불빛에 감싸여 부유하고 있다. 나른한 긴장감. 많은 이들이 고요함으로 동일한 장소에서 동일한 감정을 공유하고 있다. 무대의 한 가운데에 놓인 크고 넓은 나무 등걸에 기대어 앉은 사람의 마른 몸뚱이가 살아있지 않은 이지의 생명체처럼 비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 되게 묘하다. "

울렁이는 침묵사이에, 옆자리의 누군가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린다.

다시 바뀌는 무대의 빛. 이번에는 좀 더 붉고, 강렬한 음악이 엠프를 둥둥 울리며 뛰쳐나온다. 군중으로 바뀐 이들이 한꺼번에 쏟아진다. 그 정점에 그가 있다. 박제된 전시물처럼 굳어있는 몸뚱이가 아닌 고요함을 뇌까리는 얼굴을 가장 먼저 바라보았다. 미몽한 착각일까, 그의 눈동자가 어두침침한 관객석 사이에 앉아있는 나에게 향해 있다고 느끼는것이. 구름같은 흑빛에서 나를 찾는건 불가능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말뚝에 메어놓은 송아지가 되어, 이끌리듯 얌전하게 시선을 따라간다. 허술하게 뜀질하는 심장은 새로운 이야기를 마주하는 군중의 설레임에 덧붙여 진다. 그저 이 공간에서 에너지를 나누어 받을수 있다는게 기뻤다. 이게 바로 함께하는 자의 이유인걸까. 생각하지 못했던 곳으로 한걸음 뻗기 시작하는 나.


###



회색의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담배꽁초가 대여섯개는 넘어가는듯 했다. 홀낏 보면서도 그 수가 많다는 생각이 닿아지지 않는다. 하나의 일에 신경을 쏟아부으면 다른 일에는 안테나를 세울수 없다. 과다한 흡연량에 폐부가 썩어들어가는 건강같은건 질풍노도의 바람에 휩쓸리고 있는 내가 아랑곳할만한 일은 못된다.

" 안녕 "

여섯번째 담배를 운동화 끄트머리로 무덤덤하게 짓이기고 있는 내 앞을 가로막는 낮선 이의 등장에 새 담배를 꺼내 물 생각도 없이 반사적으로 눈을 돌렸다. 그와 더불어 반사적으로 입술이 비틀리며 삐쭉거린다.

" 선배를 보면, 붙여놓은 엉덩이 재깍 때어서 인사해야지. 90도로. "
" 그건 선배네 후배애들한테나 받으시던가요. 우리과는 평등한 세계라 그런거 안키우네요. "
" 툴툴대는건 여전하구나? "

방금 삶아놓은 밀가루떡처럼 찰지게 하얀 얼굴을 싱글거리면서 웃는 얼굴이 사내답지 않게 곱다. 삐뚜름하게 쓴 파란색 모자의 챙을 살짝 위로 올리면서 드러나는 이마엔 땀 한방울 없이 맨드름하기까지 하다. 기생집 문턱 몇백번은 넘나들어도 모자랄것이라고 쐐기를 밖아주고 싶다. 물론 그런 평을 해줘봤자. 기생집이 뭐야?라며 어리벙벙하게 고개를 갸웃할테지만.

털썩 옆자리에 같이 앉는 폼새가 거슬렸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별다른 거부의 표현도 던지지 못하고 엉덩이를 비껴 앉았다. 그랬더니 피식 웃으면서 머리를 쓰다듬는 다. 싫다고 고개를 후후훅 흔들어대며 손을 떨쳐냈다. 그랬더니 이젠 볼에다가 손을 가져다 대며 히죽히죽거린다.

" 볼때마다 느끼는거지만, 참 맛있게 생겼어. "
" 경찰에 성희롱으로 신고하기전에 그 입 좀 다무시죠. "
" 뭐, 난 성희롱 하는것보단 당하는 역할을 많이 해서. 보다시피 내가 좀 많이 이쁘게 생겼잖아? 탑 보단 바텀을 많이 해서, 후장이 많이 털릴걸. "
" 아, 선배! "

벌건 대낮에 낮빛하나 안바꾸고 내뱉는 말에 기겁하며 물리적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어푸어푸 웅웅 거리며 발버둥을 친다. 열어놓으면 또 터질꺼같아서 끝까지 막아보려 했으나 손바닥에 끈적하게 채워지는 더운김이 찝찝해서 금방 손을 털었다. 읍페페 거리며 입술을 부벼대고는 이맛살을 찌푸린다.

" 으, 짜. "
" 그러길래 누가 그러래요? "
" 그놈한테 너 가정교육좀 다시 시키라고 해야겠어. "

투덜거림을 통째로 무시했다.이제 좀 조용해 지겠다 싶으니 담배 생각이 다시 기어올라온다. 가방틈새에 삐죽하게 솟아오른 마지막 담배 한개비를 꺼내어 마른 입술에 올려놓고 불을 찾았다. 더듬더듬 어딘가에 처박아 두었을 라이타를 뒤졌다. 벤치의 틈새사이로 바닥에 나뒹구는 라이터가 설피 보였다. 낑낑거리며 녀석을 향해 손을 내뻗었다. 바둥거리며 안간힘을 쓰는 와중에 웅얼거리며 닿아지는 말. 무슨 말인지 몰라서, 귀를 위쪽으로 좀 더 올리고 되물었다. 뭐라구요?

" 사랑에 빠진 고딩새끼 같다고. "

기어이 라이터를 줏어낸 내가 추위에 먼지에 뒹군 손으로 라이터의 부싯돌을 밀며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 그딴 개소리를. "

느릿하게 어깨를 으쓱거리며 담배에 드디어 불을 붙였다. 하얗게 바스라지는 연기와 함께 혈관을 빠르게 타고 넘어가는 화학물질과, 그에 상응하여 발생하는 육체적 괘락이 실체적인 안도감을 선사한다.

찡그린 선배의 얼굴이 보인다. 시큰둥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는 표정. 더이상 휘말리고 싶지 않은 진지함까지 덮어썼다. 그 모든것을 계속 무시한채 단순한 담배태우기에 신경을 쏟아냈다.

" 공연 멋있던데요. "
" 난 출연도 안했는데, 멋있는건 니 룸메지. "

자꾸만 두서없이 넘나드는 그 존재에 이상하리만큼 적응을 못하겠어서, 답답하다.

묵직한 손으로 가슴팍을 쿵쿵 두들기고 싶지만, 그것이 아무런 긍정적인 영향도 줄수 없다는걸 알기에 더이상은 상기하기 않기로 했다.

" 그 인간 원래 멋있잖아요. 존나 짜증나게 시리. "

그래 하느님이 많이 불공평해. 버석버석하게 우스개소리를 넘기며 맞장구를 쳐준다. 근데 내가 볼땐 공평한거 같기도 하다. 애매모호하게 꼬리를 남기는 말을 하며 아이처럼 눈웃음을 짓는다. 10분전까지만 해도 음담패설을 아무렇지 않게 중얼거리던 인간이 어째서 이렇게 천진난만하게 웃을수가 있는지. 이거야 말로 조물주의 실수아닌가. ㅡ팔랑팔랑 아이같이 다리를 흔들거리다가, 시큰둥하게 앉아있는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연다.

" 대기실에 보러 같이 가자  "
" 싫어요. "

필요없는 봉인에 쌓여있다. 하지만 선배에게서 전해 받는 그 존재는 담백하다. 그 담백함이 부럽기도 하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 또한 이와 같은 간결함을 유지하고 있었으리라 짐작해본다. 그러나 그 기억이 너무나 오래전의 일 처럼 아련하게 흐릿하다.

아무것도 달라진게 없는데, 나 '만' 변했다는 사실이 나를 멀리 걸어가게 만든거 같아서 한편으로 쓸쓸해진다.

가느다랗게 휘어지는 눈가에 담긴, 선량함이 선명한 세계를 만들어 낸다. 괴상하게도 가슴깨가 서늘해지는 효과를 갖고 있는것 같다. 무어라 응수해야 하는데 목구멍에서는 말이 고스란히 흘러나오지 않았다.

무릎에 올려놓은 전화기가 웅얼거리며 떤다. 고요함을 갈라놓는 불시의 침투에 후다닥 외부에 널어놓은 선을 잡아챘다. 그런데, 겉 화면에 떠오른 발신인을 보고 망연자실해져 버렸다.

여기서 흘러보낸 이름이 떠내려가지 않고 다시 돌아와 있었다. 눅눅한 한숨이 느릿하게 걸어들어 오고, 시커멓게 옅어지는 내 표정을 보더니 선배가 우두커니 쉬고 있는 내손의 전화기를 빼앗아 간다. 나 처럼 화면을 보고, 그럼 그렇게 라는 뽀루퉁한 얼굴을 들이밀며 혀를 끌끌찼다.

슬라이드를 밀어넘겨 귀에 가져다 대고, 클클 거리는 웃음을 지을때까지도 그저 멍하니 선배가 하는 양을 지켜볼 따름이였다.

" 어. ..... 왜 . .... 알아서 뭐하게?  안 잡아 먹을테니까 그만 좀 징징거려.
  그렇게 계속 거슬리면 알아서 찾아오던가. 등신아 "

귀와 맞닿아있는 수화기의 틈새로 희미하게 들리는 목소리에 한 뼘 정도로 감정이 돋았다. 화를 내는듯 했다. 감정변화를 쉽게 겪지 않던 사람이 화를 내고 있다니. 산간벽지의 먼 산봉우리에서 정인의 행차를 구경나온 아낙처럼 아련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비현실적이기도 하고. 그러고 보니 형을 의식적으로 피한지 한참 되었다 라는 사실이 이제서야 스멀스멀 기어나오기 시작한다.


" 화났다. "
" 알아요. "


힘없이 흐느적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나긋한 선배의 목소리가 담담하게 이어졌다.

" 난 남일에 절대 간섭 하지 않는 주의인데, 이상하게 니네는 처음부터 너무 눈에 거슬려서, 계속 보게되네. "
" ...... "
" 기승전결이 필요한 관계라는게 내 잠정적인 결론이긴 한데 말이지. 그게 또 그렇게 간단한것도 아니란 말이지. "
" 그게 뭐에요. "

추위에 파르르 떨리는 눈두덩이를 부비며 느리게 길어지는 이야기의 끄트머리를 쫓아 들어갔다.

" 이상하잖아 너. "

뜬금없으나, 가느다랗게 철사가 심어잇는 말에 등뼈가 움찔거리도록 놀라버렸다. 대답도 못하고, 얼어버린 혀가 웅얼거리며 입안에 누워있었다. 힘을 꾸욱 꾸욱 주어서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 사지 멀쩡해요. "
" 흐음. 그거 아닌데 "
" 보여드려요? "

두 손을 쫙 펴서 팔랑팔랑 바람을 만들었다. 날개만 있었으면 날아가버릴 기세로 파드득 거리는 나의 우스꽝스러운 모양새를 팔짱을 끼고 관찰하더니 눈썹을 갈매기 모양으로 두어번 삐죽거리다가, 주머니에서 부스럭 전화를 꺼낸다.

폴더를 열어 몇번 쿡쿡 누르더니 전화대기 액정을 눈앞에 보여준다.

" 데려온다? "

안돼요! 쩌렁쩌렁 고함을 치며 전화기를 빼앗아 내 가방안에 쑤셔박아 버렸다. 나도 모르게 이 반응이 순식간에 일어나 버렸다. 돌개바람이 지나간 자리에 뻘쭘하게 굳어가고 있는 나를 허리춤에 골똘하게 손을 얹고 아래위로 훑어보며 혀를 끌끌 찬다.

" 멍충이. "

머리를 아프게 바닥에 쥐어박으면서 드러 눕고만 싶다. 창피하고 우글거리고 또 창피하다. 끈적하게 엉키고 메달리는 마음이야 어쩔수 없는것이고 또 나만 갖고 있는 것이니까 아직은 창피한 범주엔 들지 않았으나 그 마음을 끌어안고 있는 내가 어찌할바를 모른채 전전긍긍하는 모습은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부분이였기 때문이다.

내려놓았던 머플러를 찾아 목에 둘렀다. 담배를 주물럭거리려 내놓은 손이 꽁꽁 얼어있어서 메듭이 쉽지 않다. 선배가 나서서 메어주는것을 도와주었다. 키가 반뼘은 작은 선배의 정수리가 동그랗게 보이는데서 또 나는 형을 생각했다. 메어주고, 달래주고, 두들겨주던 그 손들이.

" 자꾸 피하려고 하지 마. 정면을 봐야지 "
" 그런거 아닌데, 왜 자꾸 그래요.. "

내가 생각하는 부분과 선배가 꺼내려고 하는 부분이 맞물리는걸 저지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 인간도 묘하게 사람의 속을 들춰내는 능력을 타고난 터라. 나같이 보호막이 옅고, 가느다란 인간은 끌려가고 만다.

꼼꼼하게 메어놓은 머플러를 만족스럽게 바라보던 시선이 나의 눈에 다가왔다. 가느다란 눈매가 선하다. 그 자연스러운 따뜻함에 나는 아이가 되어버렸다.

" 너무 오랜시간 같은 사람이랑 지내다 보면요. "
" 응? "
" 외로움을 많이 타는 사람이라면 쉽게 점령당하지 않을까요. "
" 점령이라. 먹고 먹히는 먹이사슬 같은거?  "
" 아, 됐어요. 개소리에요. "

남은 지금 속이 뒤틀려서 머리 꼭지까지 물엿처럼 찐득찐득 녹아있는데. 흥미로움에 반짝이는 눈에 속이 부우 튀어나온다. 퉁퉁 부은 볼로 입을 다무니까. 선배는 가느다란 눈을 더 접으며 머리를 또 쓰다듬는다. 느릿하게 한번, 느릿하게 또 한번

" 필요하면 말해. "

긴장감과 추위에 움츠러 드는 주먹을 꾹 쥐었다 폈다. 선배는 다정한 눈으로 나를 보고는 부스스 내 머리카락을 헝크려뜨리며 살며시 미소지었다. 누군가와 너무나 비슷한 그 빛깔에 가슴이 두근거리면서 그것을 느끼는 나의 신경이 당혹감에 뻑뻑하게 굳어져 버린다. 이 체계는 자연스러운것이 아니라는걸 이제는 나의 '머릿속'이 깨닫기 시작한것이다.

" 나 연애 할거에요. "

뻣뻣하게 다리를 피며 중얼거렸다.

" 나 좋다는 여자애도 있으니까. 연애 할수있을거 같아요. 남들처럼. "
" ....... "
" 그럼 달라지겠죠. "


코끝이 얼얼하다. 웃음이 거두어진 얼굴로 선배가 나를 마주했다. 엄지손가락부터 천천히 감싸고 도는 따뜻한 온도에 위로받는다. 미처 끼지 못한 장갑을 내 손에 천천히 하나씩 끼워주며 중얼거렸다.

" 장난이 아니구나. "


마른 침을 삼켰다. 골목에 서서 고양이를 마주하고 있는 생쥐가 느끼는 생명에의 곤란함이 엄습했다. 누가 손으로 목을 조르고 있지 않았어도 충분히 나는 헐떡거리고 있었다.





6.
첫 단추를 잘못 끼웠다. 단번에 잘라버렸다면 어쩌면 이렇게 까지 심하게 곯아버리지는 않았으리라. 반 이상을 채워넣는데 이제서야 보이게 된 끄트머리의 작은 단추 두개가 모든것을 바꿔버렸다. 제대로 될려면은 끼워넣은것을 그대로 다 풀어내야 한다. 귀찮고 힘들다고 버려두었다간 결국엔 뒤에 두 단추는 소용없이 메달려 있게 되니까.

나는 정말 아픈걸까.

거울 앞에서 뜬금없이 중얼거려본다. 초췌하게 꿈틀거리는 볼에 손을 가져다 대며 슬며시 문질렀다. 까슬한 촉감은 내 얼굴에서 비롯한 것일까, 내 손가락에서 비롯한 것일까. 어떤것이 되었던 내 몸뚱이는 온통 '뿌리를 알수 없는 그 일'에 휩싸여 있다는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였다.

" 아이씨.. "

이마를 거세게 문지르며 투덜거렸다. 미처 마르지 않은 물기가 축축하게 옮겨졌다. 벽에 걸려있는 휴지를 떼어서 대충 손을 닦았다. 거울을 한번 더 쳐다봤다. 거두어지지 않는 그림자가 걸려있는 흔적에 가슴에 묵직한 통증이 내려앉는다.

복작한 사람들의 틈새를 비집고 나온 화장실의 바깥에서 두손에 콜라와 팝콘을 나란히 들고 있던 혜진이 나를 발견하고는 참새걸음으로 쪼르르 다가왔다. 어깨 끝에 메달려있는 가방 끈이 위험해보여서 잡고있는 음료와 주전부리를 내 품으로 끌어당겼다. 고맙다며 쑥스럽게 웃는 얼굴이 평소 보는 것과 달라서 어색했다.

정말 나를 좋아하긴 하는구나. 라는 주제넘은 질문을 하고 싶을 만큼.


지갑에서 표를 꺼내 시간을 살펴보니 20분정도 남은듯 했다. 기둥에 붙어있는 의자를 권했다. 턱없는 의자에 앉으며 치마 자락을 손바닥으로 연신 내리는 모습이 중학교 여자아이처럼 귀여웠다. 큭큭거리는 나를 홀낏 보더니. 에이씨 거리면서 얼굴이 벌개지며 쳐다보면 눈알을 뽑아버리겠다며 투덜거렸다.


" 그럴거면 긴 치마를 입고 오지. "
" 시끄러. 이게 뭐 나 좋으라고 그런거냐? 다 니 눈 요기시켜주라고 그러는거다. "


그래 내 눈 호강하고 있어. 하니까 얼굴이 벌개져서는 이것 좀 더 갖다줘 하며 바닥난 음료의 컵을 내민다. 고개를 끄덕거리곤 카운터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홀낏 돌아보니 여전히 어쩔줄 몰라하며 빨개진 볼을 만지는 혜진이 보였다. 내가 그 정도의 가치를 갖고 있는 인간인가 슬몃한 궁금증이 치밀어 올라서 머리를 갸웃거렸다.


다른이에게 점령당한 감정을 털어내려 너를 만난다고 하는거라면 혜진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굶주림에 시달리다가 만난 사람이 하필이면 그 인간이라, 타고난 먹이주는 습성을 버리지 못하고 계속 내 배가 넘치고 차 오르도록 먹이고 또 먹이던 사람이라. 그런거 한번 경험해 보지 못한 나는 언제부터 그 사람의 손이 없으면 살지 못할것처럼 길들어져 버렸다고. 그게 네가 나를 좋아한다 내뱉던 의미와 같은거면 정말 나는 어쩌지.

이제까지 한번도 겪어보지 못한 일들이 한꺼번에 벌어져서, 체계적으로 쌓아놓아야 했던 사고가 이곳 저곳에 부서진채 널부러져 있었다. 내 마음, 혜진이 내게 주는 마음, 형이 나를 배려하는 다른 마음, 그리고 이 모든 체계를 정상화 시켜야하는 내 의무까지.

설익고 어설픈 마음에 안달해서 형에게 손을 내미는것보단, 차라리 이렇게라도 해서 나를 다스리는게 현명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사흘 밤낮을 뒤척인 결과니까, 자신은 없어도 나쁘진 않을것이다.

" 지운아. "

다시 채워넣은 잔을 들고 몸을 비트는데, 시끄러운 소음의 귀퉁이에서 들리는 내 이름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 형."

북적거리는 사람들이 바쁘게 오가는 인파 사이로, 보이는 사람, 말하는 목소리. 커다란 스피커에서 울려퍼지는 광고음악따위가 순식간에 뭉개져서 흩어졌다. 익숙한 쥐색코트 위로 삐죽하게 내려온 갈색 머리카락. 바람에 더부룩하게 엉켜있는 그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동그란 눈동자.

우연한 만남에 당황한건 나 뿐만이 아니였다. 잠시의 정적이 형과 나 사이를 오솔길처럼 채워가고, 몸을 완전히 틀지도, 그렇다고 돌려놓지도 못한 사선으로 어정쩡하게 음료의 컵을 쥐고 있는채 동상이 되어버린 나를 향해 정적을 먼저 깨트린 형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 너 왜 이렇게 전화가 안되는거야. "


보자마자 화를 낼줄 알았는데, 형의 목소리는 걱정스러움에 달뜬 숨처럼 푹신했다.반사적으로 반보 뒷걸음질 쳐버렸다. 움츠린 나를 보며 형의 얼굴이 딱딱해졌다. 넘치듯이 흘러가는 공기가 내가 서있는 공간에만 빠져나간것 같았다. 호흡곤란으로 밀려오는 현기증에 멀쩡한 다리가 휘청거릴 지경이였다. 등줄기로 시큰하게 땀이 솟는다.


익숙하고, 뻔한 얼굴인데. 이제는 보자마자 가슴께부터 기침이 쿨렁거리며 올라온다. 끈을 단단히 여며야 된다고 다짐하고 다짐했으면서, 벽따윌 세워놓지 못했던 미숙함은 이것들을 쉽게 풀어놓아 버린다. 하지만 이제는 더이상 그럴수가 없다. 마른 입술을 꾹 깨물며, 다시한번 숨을 고른다.

" 영화 보러온거야? "

내가 대답을 하지 않았으니, 형 또한 나의 말에 대꾸하지 않는것이 당연했다.

" 시험때문에 바빠서, 전화 못했어. 미안. "
" 바쁘다면서 공연은 보러 와? "
" ........ "
" 보러 왔으면 끝까지 보러 오던가. 그냥 나가는건 뭐야 임마. "


그 어두침침한 공간에서, 절대 마주치지 않았을거라 생각했던게 사실은 나를 향해 있었다니 신기하면서도 기분이 벅찼다. 내가 이렇게 끈적하게 굴어도 나를 생각하고 있는 형의 마음은 여전하다는것이.


정말 어떻게 하면 좋은걸까. 이런 사소한것에 메달리면서 만족하는 나에겐 답이 없다. 아니, 이렇게 형과 마주하고 있는 내가 해결이 안나는것이다. 울렁거리는 심장의 움직임이 점점 더 넓은 격차로 뛰고 있었다. 입을 벌리면 그 틈새로 붉은 기운이 뚝뚝 덩어리져 떨어질것만 같다. 하루가 멀다하고 심해지는 이 증상을, 처음 맞는 나는 정말 몸뚱이를 버려놓고 싶을 만큼 고되게 맞이하고 있는것이다.


그래서 널 좋아하는지 모르지.


다시 떠오르는 그 말. 필요없는 그 말. 농담인데, 뜻없는 건조하고 담백함에 둘러쌓인 말인데. 내 기분과 내 감정은 다른 무거움과 다른 달큰함을 그 속에 넣어서 부피를 팽창시키려 하고 있다. 내가 컨트롤 할수 없는 이 흐름에 두려움이 엄습했다. 내 손에서 풀어낸것들이 나를 잡아먹고 또 형을 잡아먹을수도 있다는 사실이.


형이 깊고 깊은 눈으로 나를 잠시 내려보고는, 집에 가자며 손을 잡았다. 손목의 맨살을 감싸쥐는 단단한 형의 손바닥이 느껴졌다. 울음이 터질것 같았다.





7.

" 이거 뭐야? "

버스에서 휘청거리고, 상수역 앞에를 발발 거리며 찾아다니느라 미처 신경쓰지 못했던 현성의 작품이 사이사이 삐져나온 피와 뒤범벅되어 더 처참하게 변해버렸다. 쓰레기통에 뭉쳐놓은 쓰레기도 그것보단 모양새가 좋을거같다. 처음부터 잘 좀 묶어놓지. 친절하게 치료까지 해줬던 녀석을 양심도 없게 원망해본다. 걱정할까봐 부러 숨길려고 했는데, 다 글러먹었다. 어이가 없다며 그 큰 눈을 커다랗게 부풀리며 다그치는 묻는 소리에 어깨를 움츠리며 손을 빼서 뒤로 얼른 숨기려 했다. 하지만 형의 완력이 더 강했다.

" 자보 쓰다가. 칼에 살짝. "
" 이게 살짝이야? 병원 안갔어? "
" 뭐 살짝인데. 그런거 가서 뭐해 "

형이 손을 잡아 끌어서 나는 바에 앉지도 못하고 서서 형 앞에 끌려들어 잡혀있었다. 어정쩡하게 서서 다 큰 남자의 손에 잡혀있는것도 창피할지경인데,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형은 내 손을 살피는것에 몰두했다. 몰두하면 몰두할수록 내 몸은 점점 더 바 안으로 끌려가고, 나는 까치발을 애써 돋으며 다른 팔로는 낑낑 거리며 몸을 부축했다. 형의 눈치를 슬쩍 보고 힘들다고 끙끙거렸더니. 짜증을 내던 형이 바들거리는 내 팔을 보고는 손을 놓았다. 그리곤 뭔가 결심한듯 바 안의 문을 열고 나왔다.


" 누나 죄송해요. 저 30분만 잠깐. "


형이 죄송하다며. 어쩔줄 모르는 표정으로 사장에게 부재를 요청했다. 여자의 나른한 눈이 뜬금없이 형의 뒤에 앉아있는 나를 홀낏 다가왔다. 낮선이의 행동에 긴장감이 돋으며, 허리를 곧게 세우고는 아무렇지 않은척 어깨를 세우곤 그 눈을 마주했다. 성인 여자들 특유의 끈적함과 관찰의 욕구가 가득한 눈빛이라 더더욱 거슬렸다. 큼큼 헛기침을 하며 엉덩이를 뒤로 빼 앉았다. 여자의 목소리엔 불만이 차있었다.


" 지금 한창 바쁠 시간인데.. "
" 죄송합니다. "

끝내 여자의 허락이 떨어지고. 그 말이 내뱉어지기가 무섭게 형이 다가와 내 손을 붙잡았다. 방금까지 물기를 닦던 손이라 차가웠다. 피부에 도돌도돌 살이 올라올만큼. 그 냉기에 형에게 쌓여있던 심통이 언제적 일이냐는듯 싹 사라져 버렸다.

걱정시키는건 싫은데, 그걸 또 걱정하는 모습을 보는게 좋다니. 참으로 우스꽝스럽다.

형이 다급하게 내 손을 잡아 끌었다.

" 가자, 너 이거 그대로 놔두면 곪아. "

강하게 당기는 힘에 이끌려 터덜터덜 가게를 빠져나왔다. 주차장으로 보이는 1층의 빈공간에 놓여있는 나무 의자에 나를 앉혀놓고는, 잠깐만 있으라며 뛰쳐나갔다. 괜찮다고 잡기도 전에. 사라진 형을 보며, 괜한짓을 했다고 후회했다. 그냥 손을 숨겼어야 했다. 나 때문에 잘 보이던 사장한테 싫은소리 들으며 타임을 빼고, 약을 사겠다며 몸 힘들게 뛰어다니기 전에.

근데 또 이러면서도, 내게 집중되어있는 형의 마음이 좋다는게. 그걸 이런식으로 확인하며 설레어 하고 있었다. 이게 말이 되는 일인가. 다 나아지고 멀쩡해졌다 생각했던게 실은 여전한 속 곯은 병신짓의 반복이였다는게.

움트는 낮선 감정에 어찌 할 바 모르고, 결국 나는 '외로움'의 해소로 여자를 만났다. 그것만으로 모든 일이 해결될거라 생각했다. 더 이상 형에게 갈구하지도 않고, 다가가지도 않아서 언제가 될 지 모르는 한계점을 마주하지 않게 되는 관계.

내가 원하는 풍경을 망치지 않기 위한 일로 나는 형에게서 도망쳤었다. 그러나 정작 나아진건 없었다. 틈만 보이면 나는 또 형에게 무언가를 원하며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 처럼 주위를 배회하고 있었다. 사랑과 관심을 구걸하는 어린 강아지 처럼.


" 아, 씨발. 나가 죽어라.."


머리를 벽에 쥐어박으며 투덜거렸다.

시간을 보려 살핀 핸드폰엔 부재중 전화 5통에, 문자까지 도착해있었다. 혜진이였다. 괜찮냐는 말에 대답이 없으니 정말 괜찮냐고 또 묻는다. 구구 절절 진심으로 메달려있는 그 걱정을 마주하니 속이 괴로웠다. 멀쩡한 손으로 꾹국 늦은 답문자를 보냈다. 집에서 잘 쉬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하는 거짓말이 익숙해진다.

" 많이 아파? "

한달음에 제 자리로 달려온 형이, 가쁜 숨을 석석 몰아쉬며 묻는다. 이마를 구긴 내 얼굴이 통증이 절절히 메달려 있는것 처럼 보여진듯 했다. 아니라고 하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정말 괜찮다고. 거푸 말하는데, 형은 시끄럽다고 다그치곤 거적대기 붕대를 하나씩 풀었다. 붕대에 얽힌 피딱지가 같이 딸려나가며, 미처 닿지 못했던 통증이 꿈질거렸다. 풀어놓은 얼굴이 확 구겨졌다. 풀어놓으니 완전 참사가 따로 없다. 거즈에 소독약을 듬뿍 묻혀서는 말라붙은 피를 꼼꼼하게 닦기 시작했다.


" 멍충아, 조심좀 하지. 맨날 덜렁거리다가 다치기나 하고. "


따끔따끔 거리는 느낌에 움찔거리자. 호오, 바람을 불며 살살 닦는 형의 손이 부드러웠다. 바람에 담겨 있는 형의 체향이 달큰했다. 내 방의 사각거리는 이불에서 느껴지던 그 향기 그대로.

가까이 다가온 형의 갈색 머리카락이 뜀박질때문에 스며든 땀에 얽혀서 가느다랗게 눌러붙어있었다. 하얗고 매끄러운 피부가 추위와 더위가 혼합된 상태로 발갛게 달아올라있었다. 빠져나가듯이 내몰리는 내 얼굴이 더 가까이 형에게 다가갔다. 형의 정수리에 내 이마가 닿았다. 닦던 손이 멈칫 정지했다.


" 어지럽다. "


소독약이 닿는 솜에서 아지랑이 처럼 피어나는 알코올이 내 피부가 아닌 나의 내면을 닦아 낸것같았다. 얇게 싸놓은 껍질을 파고든 그 물질탓이다. 허술하게 바람빠지는 웃음이 큭큭 터져나왔다.

형은 내가 더이상 무엇으로 흘러가던지 더이상 상관하지 않으려나 보다. 모자를 벗듯이. 가볍고 의지있는 움직임으로 나의 어깨를 반사하여.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가느다란 실이 지면에서 타고 들어나와 형과 나의 사이를 넓은 바다로 만들어 놓는다. 아득하고도 아득한 그 공간으로.

하얗게 정갈해진 손가락을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 처음부터 형한테 올걸. "
" 학교에서 여기까지 오다가 피 모자라서 쓰러지지. "

어색한 침묵이 메워졌다. 깜빡깜빡 눈을 꿈뻑이던 내가 밋밋한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바깥으로 돌렸다. 어깨를 반쯤 접어놓고, 남아있는 약품을 정리하던 형이 의미없는 이야기를 두런하게 내뱉는다.


" 그 애가 걱정하겠다. "


건널목에 놓인 돌 의자를 부르는것 같은 어감.  반사적으로 굳어버린 나의 손이 주머니에 있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10분전까지 규칙적으로 진통을 털어대던 그 물건을, 확인하는 손끝이 마취제를 맞은것처럼 얼얼하다. 형은 가끔씩, 의식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존재를 확인한다. 지금의 나와 형이 예전과 같지 않다는 것을, 그 사이에 놓여있는 혜진의 존재와. 그리고 나의 변화를. 힐난하는건 아니다. 현실을 보여주는것이다. 그저, 지레 찔려버린 내가 그 흔적에 겁을 내는것 뿐이다.

형이 굳이 지칭하는 '그 애'라는 대상은 마르고 건조하다. 나는 형에게 그 이상의 친절함을 강요하진 않는다. 아니, 오히려 그 이하를 바라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혜진의 존재를 거듭 꺼낼수록, 추운 나의 벌판은 더욱 얼어붙는다. 혜진에 대한 예의로서 나는 처음부터 혜진을 잘라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아니 그러지 않았다. 미약한 나의 양심이 이제서야 조금씩 꿈틀거렸다.

" 나 가봐야 겠다 "

주섬주섬 몸을 일으키니, 남은 붕대를 같이 들고 일어서며 큰 눈을 꿈뻑인다. 날 추워 꽁꽁 얼었는데, 차라도 마시고 가라고 하는 말에. 다시 들어갔다간 사장 아줌마가 나를 말려 죽일지도 모르겠다 농담하니,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린다.

노천에 자비 없이 쏟아지는 바람에, 소독하느라 벌겋게 더 얼어버린 형의 손을 무심코 잡았다. 힘을 주어서. 단 3초간. 하나, 둘, 셋, 속으로 가볍고 빠르게 셈을 했다. 어떤 의미와 감정이 전달되지 않을 틈이니까 괜찮을것이라 생각하며. 형은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익숙한 손길에 나는 한번 더 치유된다. 이건 형이 주는 거니까, 순수한거니까. 내가 받아도 괜찮은거겠지.

" 지운아. "

세 걸음 정도 느릿하게 발을 떼던 나를 형이 불러세웠다. 다시 돌아본 그 자리에, 묵묵한 표정으로 감정을 닫아놓은 형이 있었다.

팔 하나를 걸쳐놓은, 세 걸음만 옮기면 닿게 되는 그 거리에서, 세계가 완전히 나누어졌다. 형이 반 걸음 내밀어 다가왔다. 형의 세계가 나의 영역에 구름처럼 스며든다. 나지막한 목소리와 함께.

건조한 그 눈속에 반토막으로 잘라 있는 슬픔이 녹아있다.


" 그냥 부르고 싶어서.  "


마른 숨을 넘겼다. 초초한 나의 시선이 결국은 형의 코트 끝자락에 메달려 있었다. 이런 곤란함은 내가 감당할 만한 속성이 아니다. 묵직한 공기가 나를 누르며, 손가락의 무심한 생채기를 다시 한번 갈라내놓으려 하고 있다. 터진 아픔이, 내가 잘라냈고, 형이 치료했던 그곳이.






8.
나는 형이 필요하지만, 내가 그의 이름으로 할당해 놓은 의미를 짐작할수 없다. 머리가 있고, 눈이 있고, 형체가 있으나 아무것도 내뱉을수 없다는것이 얼마나 사람을 피곤하게 하는일인지. 머리를 싸매고 싸매도 답지에는 연신 '모르겠다'라는 애매모호한 서술지를 반복할수 밖에 없는 나의 무능력함에 진절머리가 치밀어 오른다.

지난 1년을, 의도한건 아니였으나 자연스럽게 '공존하는 이'로서의 삶을 살았다. 그 익숙함에 동화되는건 기이현상도 아니였다, 유별나게 굴 필요가 없는 그저그런 평범한 시간의 흐름이다.

나는 여전히 처음 만났을때 형의 옷 차림을 기억한다. 동아리 방 테이블의 가장 왼쪽 끄트머리에 앉아서, 초록색 덩크 로우의 발 목 끄트머리 쿠션을 검지 손가락으로 만지작 거리던 그 세부적인 움직임들도.

그 기억이 내게 주는 의미를 이제서야 부채로 떠안아야 했다.
나는 어디로 가야하는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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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10년 여름부터 가을까지
2. 부분부분 도막질 내서 정리
3. 이것도 고민의 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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