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개

아이 2011.07.11 01:07 read.226




1.
지끈거리는 두통에 괴로웠다. 언제부터였을까, 이유를 알수없는 두통이 지속되었다. 마치  욱신거리는 생체기를 붙잡고 쌓여있는 시체더미를 넘어가는 군인의 걸음처럼 느리고, 미련하게.

평범한 일상속에, 평범한 사람은 평범하게 웃으며, 평범하게 시간을 떼우지만. 통증과 친구를 맺지는 않으며, 높은 빌딩위에 몸뚱이를 투척하고 싶은 강렬한 욕망같은걸 자리끼처럼 머리맡에 두고 살지는 않는다.

범람하는 인간의 틈새에서, 시큼한 인간의 냄새를 맡으며 코를 틀어막았다. 괴로웠다. 아침 8시의 지하철은 싱그러운 햇살로 묘사되는 상쾌함과는 거리가 멀다. 빠르고, 반복적이고, 침침하다. 그리고 두렵다. 부딪치는 인간의 물결과 그 안에 개미처럼 파리하게 짓눌리고 있는 불행한 육신을 지속하는 삶도.

미세하게 후들리는 더위와 함께, 간헐적으로 터지는 기계음이 열차의 도착을 알린다. 묵직한 다리를 두들기며 스크린도어를 향해 한발자욱 앞으로 다가갔다.

눈을 크게 떴다. 노오란 포스트잇 위에 까만 별 무늬가 작게 그려져있었다. 가슴이 철렁 주저 앉았다. 의미없는 장난전화가 던져놓은 깔그러운 덪에 나의 뒷다리가 덥석 물리고 마는 그 현실감, 겁박한 실제상황의 무게가.  

후들거리는 손으로 진동하는 전화기를 붙잡았다. 액정위에 떠있는 출처미상의 번호를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 절망했다. 이건 더이상 장난전화에 엮긴 에피소드가 될수없어졌으니까.  


" 알아보실줄 알았습니다. "

그 담담함에 기가 찰 노릇이였다.

가면을 천천히 벗는다. 노릿한 역광에 부신 눈을 부비며 상대의 얼굴을 살폈다. 근거리에 놓인 또다른 생명체의 육체로부터 뭉근한 더위가 피어오른다. 스치는 시큼한 땀냄새, 불쾌한 여름의 흔적을 느끼며 다시금 상대를 살폈다.


" 오래간만입니다. "


미친, 이라는 소리가 목구멍을 절로 비집고 터져나왔다. 너무나 평범하게 생긴 소년이, 너무나 일상적인 말투로 건네는 인사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나는 정말 미쳐가고 있는걸까, 이건 쓸데없는 꿈이다. 손을 내밀어 그의 팔목을 붙잡았다. 검지손가락 아래에서 미세하게 꿈틀거리는 혈관의 움직임이 느껴진다.


" 이런걸 원하는거 같아서. "
" 뭐, 뭘.. 말이야? "
" 어린 남자아이, 심미적인걸 좋아하잖습니까. "


기가차게 사람의 취향까지도 간파하는 서비스라니. 낭랑하게 튀어나오는 말에 너무나 놀라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그런 나의 반응을 보고 그가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이마를 느릿하게 찌푸렸다.



" 이번에도 타이밍을 잘 못맞춘건가요? "
" ............. "
" 정말 어렵군요, 당신은 너무 변덕이 심해서. "


노곤한 감정이 선명한 지점으로 변화한다. 이건 꿈이리라. 꿈일것이다. 그렇지만 꿈 치고는 소년의 마른 어깨에 내려쬐는 조명이 지나치게 선명했고, 상투적으로 볼을 꼬집으며 오감을 더듬기엔 살아있는것들이 너무 많이 움직이고 있다는걸 무시할수는 없었다.


" 이번엔 믿어요, 제대로 마주하고 있으니까. "
" 이게 무슨.."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눈을 꾹 감고 귀를 틀어막으며 중얼거렸다. 이제 눈을 뜨면 모든것이 깨끗하게 돌아갈거라고. 더위에 헐떡이며 막힌 혼구멍이 쓰임없는 허상의 구렁텅이에 정신을 몰아가고 있는것이라고. 그러나 이마에 서늘하게 닿아지는건 또다른 누군가의 피부다. 눈을 떴다. 엄지손가락 한마디도 비집고 들어가기 어려울만큼 가깝게 다가온 그의 두 눈동자가 묵묵히 나를 담아내고 있었다. 담담한 그의 말이 이어졌다.


" 현실의 괴로움에 사투하는 이들은, 피할곳을 마련하기 위해 숨어들죠. 그것을 갖고 있는 당신은, 이곳에 있는 인간들 중에 흔하지 않은 행운을 지닌 사람입니다. 당신은 고통에 가득차 비명을 질렀지요? 나를 부르지 않았습니까? "
" 말도안돼. "
" 이번엔 당신이 좀 더 버틴 이후에 저를 찾을줄 알았는데 이번에도 꽤 빠른 시간 내에 나를 불러서 좀 놀랐습니다. "
" ........ "
" 당신의 인내심이 짧은 걸까요, 아님 이곳이 지나치게 질척한 곳이기 때문인걸까요? "
" 미치겠네, 누가 뭘 불렀다는건지.."
" 여전하시네요, 그 미련한 솔직함은.  "
" 아 제발 좀. 헛소리 집어치우고. 진짜 나한테 원하는게 뭐에요. "
" 당신이 원하는것. "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자, 옅은 갈색빛의 눈동자가 연 노란 색으로 바뀌었다. 기이한 시각적 변화를 감지한 나의 등골이 오싹하게 굳어졌다.


빙긋 웃으며 다가오는 그가 검지손가락으로 나의 눈썹을 쓸어내렸다. 서늘한 감촉에 가슴언저리가 움찔거렸다. 실제하는 것들이 온통 솟구쳐 올라 경계를 허문다. 알수없는 낮선이로 끌려가는 이 강렬한 감각은 어떻게 설명할수 있을까. 두려움을 목덜미에 메달고 돌진하는 미련한 소처럼, 나는 알수없는 걸음을 떼어 그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그가 이야기하는 괴이한 논리에 마음을 기울이고 있었다.


" 나는 당신입니다. 당신이 갖고 있던 원래의 것, 당신이 미루어 두었던 저 먼곳으로 부터 온 또다른 당신. 당신은 나를 잘라냈지만, 사실 당신은 처음부터 알고 있죠. 내가 어떤 존재인지. "


그가 나의 얼굴을 붙잡고, 천천히 입술을 맞닿는것을 아무런 저항없이 고스란히 받아버린다. 놀란 두 눈 너머로 맞은편 플렛폼에 서있는 아주머니와 아저씨들의 괴상한 얼굴이 보인다. 다 큰 남자와, 어린 소년이 입술을 부딪치고 있는 장면을 바라보는 경악에 가득찬 시선들이 내게 쏟아진다. 당혹함에 그의 어깨를 밀치며 도망가려 하지만, 그가 나의 손을 붙잡았다. 그와 동시에 얼음 위로 녹아내리는 살큰한 설탕처럼, 점점 그곳을 향해 미끌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2.
" 내 할머니는 아니에요. "

뜻밖의 이야기에 그를 쳐다보았다.

" 오다가다 밥 한술 얻어먹고, 말 몇마디 부친게 다에요. "
" 너무 정성스럽게 간호를 해서, 혈육이라 생각했는데. "
" 할머니 옆에서 시중들다가 이 방 한켠에서 잠들수 있으니까요, 처마밑에서 자는것보다는 훨씬 나아요. "
" .... "
" 그쪽은 그런거 모르죠? 이렇게라도 해서 빌어먹고 살아야 하는 사람이 얼마나 절박한지. "

할머니의 이마를 덮은 미지근한 수건을 차가운것으로 바꾸었다. 꼼꼼하게 얼굴을 닦는 손길이 사내아이 답지 않게 섬세했다.

" 사실 절박한건 아니에요, 얻어먹고 터지고 다니는 삶이 지긋지긋해져서. 뭔가 남들이 말하는 의미있는 일 하나쯤은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근데 별로 의미있는거 같지는 않지만.. "
" 의미 있어요. 당신 덕분에 할머니가 살아있잖아요. "
" 나 아니더라도 그건 누구나 할수 있는 일이에요. "
" 왜 계속 자신을 부정하죠? "
" 없으니까. "


쓸쓸해 보이는 표정으로 소년이 다시 한번 중얼거렸다. 없다고.


" 부모를 알지 못한다고 해서 자신이 없는 삶을 살고 있는건 아니에요. "
" 그것도 하느님이 가르치는 말씀이라면, 하나쯤은 세겨둘게요. "
" 난 당신이 좀 더 앞으로 걸어나왔으면 좋겠어요. "
" 무얼 위해서요? "
" 당신을 위해서. "
" 이미 충분히 날 위해서 살고 있어요. "
" 그 책. "


소년이 다시 움츠려든 눈으로 시선을 피한다.


" 그 작은것 조차 가질수 없는 삶을 사는건, 당신을 위한게 아니잖아요. "
" 아니에요. "
" 난 당신이 좀 더 솔직해졌으면 좋겠어요. "


소년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당으로 향하는 쪽문을 열었다.


" 이제 그만 가주세요. "


화난 얼굴은 아니였다.




3.
애석하다. 바람이 부는 그곳을 버틸수가 없는 어린 가슴이. 전쟁과도 같은 바닥에 맨들하게 나뒹굴기엔 아직 무른 돌맹이다. 낮은 눈, 저민 시선 하나에도 감정이 스치는 섬세한 사람은 인간의 파도를 감당할수 없다.

눈을 마주쳤을때, 파르라니 스치던 시선을 기억해야 했다. 사각거리는 셔츠의 끄트머리를 잡아쥐던 하얀 손등이 유달리 살아있지 않은 무언가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깊게 관련하고 싶지 않은건 인간에 대한 무관심이 아닌 뭉근한 증오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관심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상대에 대한 거부감은 비례된다. 다가오는 인간을 향해 기꺼이 품을 내어줄이는 흔치 않으니까.

"애달프고 달뜬 감정을 부여잡고 사는게 이곳의 운명이라면, 이 해일을 고스란히 감당할수 있을까요? "
"....."
"진심으로 이곳을 벗어나고 싶은데, 진심으로 이곳을 향해 달려나오는 인간들을 보면, 이해가 가질 않아요.."
"그것 또한 가진자의 여유일지도 모르고."
"이곳은 너무 끔찍해요, 그렇지만 가장 큰 문제는 나는 이곳에서 태어났고. 여기 이외엔 돌아갈
곳이 없다는 거에요. 나의 부모도 나를 감싸줄수 없는 잔인하고 날카로운 전쟁터에 불과한 이곳 밖에는 날 받아줄 곳이 없어요.. "


내가 그녀를 깊이 사랑한만큼, 그녀가 나를 이해할수 있었다면. 내가 그녀를 생각하는것 만큼 그녀에게 내 존재가 완전하게 스며들었다면, 이 모든것들은 달라질수 있었을까. 부질없는 과거에 대한 집착이 현실의 후회를 밀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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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중.

1. Gate
2. 필름 속을 걷다
3. Se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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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30% 2011.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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