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증나는 시사에 꿈꾸는 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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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금의 시사저널 행태는 자본과 언론이 어떤 성교를 하고 있었으며, 나같이(절대 낙관주의 및 긍정주의자 ㅎ) 설마설마 그런 일은 없을꺼야라고 생각하던 이들에게 자본에 대한 언론의 충정어린 태도를 확인시켜주는 극명하리 드러나는 에피소드다. 신자유주의의 사회제도는 법과 민주주의가 아닌 돈 앞에서 운행된다는 정의가, 언론이라고 그것도 조중동이 아니라도, 그것이 한달에 한 번 나오는 잡지일지라도 자유로울 수 없으며 편집장 자리에 돈이 앉아있음이, 한국에서 아주 미시적인 간행물에서 증명된 것이다. 아직도 정신 못차렸다고 하며 짝퉁 시사저널에 대해서 대항하는 기자들에게 욕지거리를 하거나, 그들이 정의라고 생각하는 또 다른 우리(삼자)가 분명히 있겠지만, 기자들은 당연히 해야할 일을 하고 있을 뿐이다.
저널리즘 나부랭이같은 어려운 학문적 단어를 버리고 간단하게 말해서 신문의 정의는 객관적인 사실이다. 곧 진리에 있다. 삼척동자도 아는 간단한 이 논리는 유독 한국에서는 포장된 명제에 속한다. 그것은 삼성에 놀아나는 시사저널 사장의 뻔뻔한 편집권 행사권리만큼, 혹은 끝까지 기자로서 당연해야 할 편집권을 가지고 싸우는 저들의 행보가 이상하리 만큼 아둔해보이거나 혹은 장하거나 눈물겹다는 동감이 드는 양 만큼,한국의 설정이 오른쪽 그것도 맨 오른쪽에 있는 썩은 새끼 손가락으로 정해져있어서이다. 결국 편집권은 사장에게 돌아갈테고, 기자들은 다른 시사저널을 창단하게되는 귀결이 이루어질 가망성이 크다. 제국주의 시장논리에 동참하는 한국엔 어떤 선택권이 없는 것처럼 똑같은 구조가 적용되는 저 사건에도 이미 시사저널 안에서의 선택이란 기자들에겐 없을듯 하다.
'한 때 팬이 칼을 이긴 적이 있으니, 이번에는 팬이 돈을 이겨야 된다.'는 어떤 인터뷰이의 말이 내내 걸리지만 돈은 분명 칼보다 강하다. 자본은 칼처럼 때리지 않고 우리를 유혹함에 있어 스며든다. 스며듦은 같이 싸울 수 있는 성질이 아니라 처음부터 본인의 완벽한 차단에 있다. 종교인들이 말하는 자신과의 싸움말이다. 시사저널에 대항하는 저들이 마지막 언론의 보류라고 생각은 안 하지만, 저들의 기자라는 계급적, 권력적 위치를 떠나 어떤 노동자들이 스며드는 자본을 차단함과 직업의식에 동의를 보낸다.
처음은 드림걸스에 대한 단평을 시작하려 했으나, 워낙 짜증나느 사안에 그리고 영화 내용이 어느정도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기에 다른 이야기를 해버렸다. 드림걸스 역시 아카데미 후보작이기에 자본에 스며드는 음반계의 군중들을 묘사하며, 거기에 인종차별이라는 주제까지 넣는다. 간간히 역사의식도 집어넣는 전혀 성찰 따위는 없는 무의미한 화해와 용서의 요청에 아카데미의 선택이 뻔함을 인정하지만 영화는 그런 부분들을 제외하더라도 노래와 연기 만으로도 충분한 제 몫을 한다. 뮤지컬의 꿈과 환상을 비쥬얼로 재현하는 노련한 공식이 그 안에 있다. 시카고와는 다른 방식인데 시카고가 배우들의 발성과 몸짓 컷의 사용이 더 연극적이었다면 드림걸스는 더 영화적이라고 할까?
# by 마지막사파티스타 | 2007-02-08 01:47 | 관련글 | 덧글(2)
출처:[
http://hotida.egloos.com/901972]
사족1.
주인님 안계실때 업어온건데 괜찮을라나 모르겠네요(긁적)
사족2.
낙관주의자는 아니세요(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