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장난에 약한 나는 또 9회말 2아웃을 보고 홀딱. 스물다섯엔 아득하기만 했던 그들의 '서른'이 나의 콧등 언저리로 다가온 지금, 스물아홉을 보내며 쓸쓸히 막걸리를 기울이는것이 과연 청춘의 끝물을 지나는 서른의 필수입문코스인지에 대해 되묻고 싶어졌다. 이십대 초반인 여자아이들을 볼때 늘어지고 주름진 자신의 신체를 투덜거리고, 8살 어린 남자친구를 지칭할때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표현보단 '앞길이 창창한, 기특하고 이쁜아이' 란 표현을 더 즐겨 쓰는 난희보단 좋아하는것만 주구장창 파고드는 무심한 고집을 가진 서툰 스무살 초입의 주영이 쪽에 더 가까워서 그럴지는 몰라도.
난희는 5년동안 지리하게 붙잡고 있던 '글'과의 고통스러운 연애를 마무리 한다. 여전히 쓰고 싶어하는 욕구는 강렬하여 그것을 곰씹을수밖에 없는, 그저 미련한 보통의 인간이지만 그녀는 놓는것을 '선택'했다. 중요한건, 실패와 좌절로 얼룩진 눈물을 닦아내며 억지로 손을 털어낸게 아니라, 지금이야말로 놓는것이 자신에게 더 나은 길이란것을 그녀 '스스로' 담담하게 받아들였다는것이다. 타성이 아닌 자신으로 부터 나온 선택. 이것을 인정하는 과정 또한 진솔하고 담백하다. 쓰는것이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이제는 그만두겠다 하면서도 정작 편집자로서의 길을 받아들이겠어?라고 묻는 말에는 잘 모르겠다고 말하는 난희. 결혼도, 일도, 사랑도 어찌보면 처음과 나아진것도 없이 지리멸렬하게 이어지는 선택의 연속이지만. 그것 또한 삶이기에 그 고민의 과정도 기꺼이 수긍한다.
불완전한 성장의 궁극적 결과는 완성된 삶이 아니다. 청춘을 거둬낸다는 서른의 정점에서 그들이 만나는것은 서글픈 청춘의 종말이 아닌, (여전히 '선택'해야할것들이 넘치고 넘친다는) 무궁무진한 삶의 연속성이다. 인생에 대한 무기력도, 이루지 못한 꿈을 향한 아득한 그리움도 평범한 일상의 고통으로 수렴한다. 그렇기에 또 하루 저물어 간다는 노래를 부르며 걸어가는 그들의 어깨는 무겁지도, 달뜨지도, 눅눅하지도 않은 것이다.
1. 담대한 성장의 용기인것일까. 아직은 닳고 닳지 않은 솔직함인것일까.
30년 지기인 형태와의 관계를 망치고 싶지 않으나, 내달리려 하는 감정을 억지로 붙들지는 못하는 그녀를 정의하기엔 어느쪽도 충분치 않다.
2. 그러니까, 정말 이 '말장난'을 당해낼 재간이 없다. 쫄깃하게 씹어지는 그 질감이 너무 좋아. 너무너무 갖고 싶다.
3. 이런 훌륭한 이야기꾼들이 서는 입지가 좁아진다는게 이해할수가 없다. 여지나 누나는 2009년 결혼못하는남자 이후로 소식이 요원하시고, 송지나누님은 편성도 못받아 표류하고 있다. 그런데도 비틀린 복수와 복수로 점철된 단묘한 이야기들이 넘처나는 전파들은 무엇으로 '변명'해야 하는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