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고 있는 지식에 대한 화두는 이것이다. '인간이 학업을 평생 유지하는것이 생존을 위해 회피할수 없는 일이라면, 그 '지식'이란 속성에 대해 인간은 어떤 태도를 갖추어야 하냐' 단순한 도구로서의 역할을 부여하는것으로 끝나느냐, 그 이상의 경외심을 갖고있어야 하느냐. 도구로서 필요하다면, 얻어가야 하는 지식의 속성(섭취해야 하는 먹이들)을 어떻게 선별하고 체득해야 하나.
그래서 과잉 정보의 홍수속에서 가장 필요한것은 '선택'이 되었다. 넘처나는 도서관의 서가를 넘나들으며 얼마나 빠른 시간내에 좋은것을 얻어가느냐가 관건이다. 먹고 사는 일은 속도전이다. 경쟁을 하고 싶지 않아도 해야 한다. 재화는 한정되었고, 그걸 나눠먹는 인간들은 고군분투해야 하니까. 그것의 우위를 선점하는것이 정보 이며, 그건 결국 지식이다. 그러므로 무엇을 먹고 사느냐라는 고민은 이것과 직결된다. 나는 어떤것을 선택해야 하는가.
그러나 내겐 그게 없다. 우유부단한데다가 욕심이 많아서, 바탕이 안되는 주제에 이것저것을 다 삼키려고 하니 결국 얻는건 지지부진할뿐. 그래서 '또' 모든 명제는 원점으로 돌아온다. 선택에 대한 기준이 모호한 이에겐 이 모든것은 뿌리가 없는 고민이다. 그래서 또 찬찬히 문제가 되는 지점을 살피기 시작한다.
안전한 삶을 살고 있다. 가끔 엄습하는 인권의 박탈로 인한 불쾌감(어차피 어딜 가도지배층이 되지 않는 이상 피지배층일수밖에 없는 시발 ㅈ같은 조직사회이겠지만 여긴 좀 과하긴 하다는) 과 십몇년후쯤 도래하게 될 고용해제에 대한 불안감은 제외하고 먹고 사는데 적당한 돈과 적당한 노동력 착취와 적당한 시간 안배가 가능한 삶이다. 그럭저럭 버티면 적당히 살다 뒈질수 있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가장 원했던 삶의 형태는 '적당함'이였다. 불안함을 버틸수 없다 결론하였기때문에, 가장 장기적으로 '버틸수 있는 것'을 원했다. 지금이 그것에 대한 답인걸까. 나는 버는 일과 쓰는 일을 지나치게 단순하게 분리해서 생각했다. 시간이 한정적이고, 선택을 할수 있는 여건이 부족하하니 버는 일과 쓰는 일을 동일하게 생각해야 했었는데 그러지 못했다. 쉽게 생각한 안일함이 부른 참사가 오늘날의 내게 쓰게 돌아온다. 선택을 마냥 쉽게만 생각했던 인간의 무지함.
누군가는 이런 일을 하며 평생을 살수 있다고 - 어차피 특이한 변동사항이 없는 한 - 그 안전성에 큰 표를 던지며 내게 '배부른 고민'을 한다고 이야기 하지만, 끝끝내 이곳을 벗어나야 숨이 쉬어지겠다 생각하는 종자라면 답을 얻을수가 없다. 여기선 배울게 없다. 한계가 있는 지점을 바라보며 사는건 삶에게 잔인한 고문이다. 진정 원하는게 '현자'라면, 선택을 해야하지 않을까.
Q: 원하는것은 과연 무엇인가.
A: 모르겠어요.
답답함과 부끄러움에 한숨을 쉬는 내게 소크라테스 형님이 격려 훈수 하나를 두어준다. 무지함을 아는 인간이 진정한 지인이라고. 그래서 작게 중얼거리며 안심한다.나도 그럼 지인의 반열에 오를수 있나요 라고 하지만 관에서 뛰쳐나오신 그 양반이 내 등짝을 걷어차주러 이곳으로 날아오고 계시다는
언제나 문제점은 참 잘 파악하고 있는데, 입만 살아서 문제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 이 구제할수 없는 병신미에 눈물이 다 나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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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존나 하기 싫어 발악하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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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마신 술이 안깨 나도 인자 늙었나부다 ;ㅅ;